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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로 위장한 파괴에 현혹돼선 안 된다!

렐레번트, ‘어벤저스: 엔드게임’의 마력(?)과 심각한 위험성 볼 수 있는 성경적 비평 소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는 대부분 외계인의 침공이라든가 지구를 뒤덮는 자연재해 같은, 지구에 대한 가공할만한 종말론적 위협으로 시작된다.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궁극의 위협을 가져온 건 바로 '타노스', 외계 빌런이다.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마지막 장면에서 우주의 힘이 담긴 인피니티 스톤 여섯 개를 담을 장갑, 인피니티 건틀렛을 차고 등장한 타노스. 그런데 이 외계 빌런은 뜻밖에도 스스로 '필연적인 존재(inevitable)' 즉 신이 되고자 한다. 

바로 이러한 서사적 내용이 담긴 영화 '어벤저스: 엔드게임'이 개봉 첫 주에만 전세계에서 12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흥행 수입 신기록을 세웠다. 그만큼 지난 10년간 쌓아왔던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가 3시간 동안 ‘엔드게임’에서 펼쳐지고, 이에 지구촌은 완전히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이 영화를 보고 마냥 열광할 수만은 없다. 영화 안에는 분명히 지극히 할리우드적인 그리고 마블 영화사의 세계관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영화 내용을 소개하고, 이 영화를 보고나서 불편함을 느낀 크리스천의 글을 소개한다(The Strange Appeal and Serious Danger of Saying Thanos Was Right: With the arrival of Avengers: Endgame, it’s time to reevaluate the Mad Titan). 

2008년 처음 개봉한 '아이언맨' 이후, '어벤저스 엔드게임'은 22번째 마블 영화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고정된 자원이 지구, 나아가 우주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는 '혜안(?)'을 가지게 된 타노스는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면서까지도 손에 넣은 여섯 개의 인피니티 스톤으로 지구와 전 우주를 구원하고자 무차별적인 '심판'을 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구는 물론, 우주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감히 '지구의 한 줌도 안 되는 어벤저스' 무리가 양자물리학 따위를 동원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가 없애버린 그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고자 한다. 반을 살려놓았더니 사라진 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과거의 오류를 되풀이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 시간의 틈을 비집고 나온 타노스는 이번에는 다른 결정을 내린다.

영화 ‘토르: 라그나뢰크(신들의 몰락)’처럼 아예 기억할 존재들을 없애버리고 천지창조부터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타노스 그 자신이 '필연적인 존재'이기에 바로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의내린 '필연적인 존재', 지구어로 번역하자면 '하나님’이다. 

상실로부터 시작된 “어벤저스: 엔드게임”은 그 상실의 아픔을 필연으로 수긍하는 대신, 양자물리학이라는 최첨단의 과학을 끌어안으며 과거를 복구하고자 한다. 비록 폐해를 남발하는 인류의 역사였지만, 필연적인 존재의 심판 대신 그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를 스스로 선택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어벤저스: 엔드게임’의 결론은 숱한 오류와 폐해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와 인류 역사, 그리고 인류 발전에 대한 ‘긍정적 헌사’다. 신의 심판 대신 인간의 손으로 자신들이 벌려놓은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겠다는 주체적 의지의 '반신론적' 표명이기도 하다. 물론 그 중심에 미국 문명의 정점인 아이언맨과 아메리카니즘의 대변자인 캡틴아메리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한편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크리스천 벤 플리글(BEN FLEAGLE)은 이 영화 안에 담겨진 이상한 매력(?)과 심각한 위험성을 말해준다. 바로 미친 타이탄인 타노스를 성경적 관점에서 평가한다.

‘스타워즈’의 황제 펠퍼틴부터 스잔 콜린스의 ‘헝거게임’에 가학적인 스노우 대통령까지, 영화에는 대표적인 적이나 악랄한 계획이 적지 않다. 오늘날의 가장 큰 악역 중 하나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한정된 자원과 우주의 인구과잉의 해결책으로 대량 살상을 계획하는 냉정한 군 지도자, 마블 서사의 악당 타노스다. 타노스의 의도는 정당한 문제에 기초해 있지만 그의 방법론은 크게 잘못돼 있다.

이 비뚤어진 타이탄인은 우주 생명의 반을 제거하면 생존자가 번영할 것이라고 믿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그럴듯하다. ‘인피티니 워’에서 양녀 가모라와 논쟁하면서, 타노스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모라 고향 행성의 대량학살을 자신의 윤리적 명분으로 인용한다. 자신이 개입한 후로 살아남은 아이들은 ‘부른 배와 맑은 하늘’만 알게 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종종 #Thanoswasright(‘#타노스가맞았다’) 같은 경향의 보호막을 일으키며 타노스를 따르는 합법적인 추종자 팬을 양산해 낸다.

그러나 타노스의 추론은 생명의 가치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타노스는 정말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죽음은 자신의 큰 그림의 계획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당연히, 생명은 통계적인 살인자를 통해 맞바꾸거나 조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의 영혼은 깊은 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바로 그래서 어떤 대량학살의 해결책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타노스의 가장 큰 실수는 교만이다. 모든 그릇된 생각의 오류를 떠나, 우주의 고치려는 타노스의 계획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린 것이었다. 가모라에게 설명하듯이 타노스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유일하게 자신이라고 믿고, 오직 자신만이 옳을 수 있다는 자아도취 된 정신상태를 고수한다.

변화의 무게는 그의 어깨에만 있다고 믿어서, 자신이 우주의 이익을 위해서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구세주다. 이것은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괴물의 정신상태와 같다. 그것은 창조로 위장한 파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진짜 세계의 폭군은 영웅으로 나타났다는 데 있다. 그 통치 아래에 살던 시민은 이야기의 다른 면을 보아, 폭군의 등장을 구세주의 탄생으로 오해했다. 우리가 어떤 인간에게 신뢰를 두게 되면 그가 정치인이든 운동선수이든 지식인이든 그가 부패하기 쉽다는 사실을 놓칠 수 있다. 진정한 영웅은 등장할 수도 없다거나 사기를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의 미화가 제어할 수 없는 위험한 자만심이나 권력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보라색 타이탄인의 등장이 오늘날 우리에게 위협의 태세를 줄 것 같지는 않지만 타노스의 망상은 일상생활의 지도자에게서 선명히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권위를 너무 많이 가져간 상사나 항상 말로 대중을 기쁘게 하는 정치인이든지, 우리는 이들의 숨겨진 폭군의 모습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발뒷꿈치 아래서 이런 ‘망각한’ 시민을 비웃을 수도 있지만, 쉽게 설득력 있는 연사의 공허한 약속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미묘한 강압이 폭군의 가장 좋은 권력의 통로다. 관계나 타당성이나 사랑에 대한 필요가 이용당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런 가정된 영웅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폭군은 대중의 호소를 통해 세상에 대한 문제를 만들어 지도자의 왜곡된 이데올로기에 헌신된 새로운 씨 뿌리는 추종자를 생성한다. 타노스가 블랙 오더에게 충성심에 영감을 주었던 것처럼 폭군은 부하의 열정을 키울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발판으로 해 비뚤어진 표제와 집단사고(groupthink)를 폭군이 하나의 매개체로 사용할 수 있지만 폭군과 더불어 생각 없이 따르는 사람들 모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크든 작든, 폭군은 물러나게 만들어야 하지만 잘 계획하고 옳은 자세로 시도해야 한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 나와 있듯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 이것은 귀와 눈을 비이성적인 논리를 깨닫고 불식시키는 데 맞추고, 폭군의 말에 여전히 동요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보이고 행동으로 용기 있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벤저스는 전투에서 타노스를 굴복시켰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으로 독재자를 대항하라고 부름 받았다.

 

05.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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