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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우상’될 수 있다!

CT, ‘가족 먼저’라는 교회가르침에 대한 러셀 무어의 성경적 진단/지침 보도

많은 사람이 북미 기독교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가족’일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으로 일면 타당하고 필요하며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제자 삼으려 한다면, 사람들이 우상들을 멀리하도록 가르쳐야 한다(요일5:21). 그런데 이 시대의 우상들은 대부분은 가족책임감(family responsibility)이라는 ‘압박’과 심지어 가족개념(family definition)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다는 미명을 내세운다. 바깥의 문화가 성문란, 성정체성 혼란, 이혼 문화, 결혼생활의 파탄을 추켜세울 때, 교회는 다른 시각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명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족에 대한 사명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밖의 세상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질서와 안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대부분 “가족”의 가치를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가족을 “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10:29, 30).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버린다”는 뜻을 지금 시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 정말 가족을 버려도 되는 것인가” 라고, 세상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문제가 또 있다. 가족을 사랑하고 책임지며 살아가는 것이 자칫하면 “미묘한” 우상숭배의 영역 안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셀 무어(Russell Moore)는 이러한 가족에 대한 교회 안팎의 긴장관계에 대해서 한마디로 “가족이 먼저가 아니다”라고 명쾌하게 대답한다(Russell Moore: Putting the Family First Puts the Church at Odds with Jesus: He came to divide sons from their fathers and daughters from their mothers-not to promote “family values.”).

무어 박사는 먼저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크리스천들과 가족에 대한 헌신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동등 되게 인정받는 북미 기독교 교회의 이상한(?) 현실을 고발한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경제 안에서 가족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가족이 우상이 되는 것을 결단코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가족이 먼저라고 교인들에게 마치 형이상학적 가치를 가르치지만, 구체적으로 주님이신 예수 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가족을 섬기며, 자녀들을 양육해 건강하고 성경적인 가족을 꾸려나갈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우상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와 구별이 요구된다. 

우상과 우상숭배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대인들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 그저 고대인들의 미신적 종교관습에서 금이나 은, 동 같은 금속으로 형상을 만들어서 세워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팀 켈러 목사는 현대인들 또한 그 모양만 다를 뿐, 똑 같은 우상을 가지고 있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Counterfeit Gods: The Empty Promises of Money, Sex, and Power, and the Only Hope that Matters). 한마디로, 그는 우상을 가짜 신(counterfeit gods)이라고 부르면서 과연 어떻게 고대인들의 미신적인 우상숭배가 현대인들에 삶 속에 속속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파고들었는지를 적나라하게 지적해준다.

켈러의 정의에 따르면, 가짜 신, 즉 우상이란 “우리의 삶에 아주 중심적이고 본질적이어서 만약 그것을 잃게 됐을 때 우리의 삶 자체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켈러에 따르면, 우상은 본질적으로는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우리가 인생의 의미 자체를 거기에 걸게 될 때 우상으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가족이나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직업이나 돈을 버는 것, 성취 그 자체, 다른 이들의 칭송, 혹은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대한 생각, 수치심, 사회적 지위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또한 로맨틱한 이성과의 관계도, 동료들의 나에 대한 인정도, 내가 얼마나 경쟁력을 가진 사람인지도,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도, 아름다움도, 혹은 내 명석함도, 위대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대의도,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인지도, 심지어 종교적 사역에서의 성공을 위한 바램도 우상이 될 수 있다. 

결국 켈러 목사는 무언가가 사람의 마음속에 깊은 갈망으로 자리 잡아서 그 사람의 모든 동기와 삶의 방식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삶에서 그 무언가가 우상이 됐다고 정의한다. 

한편 가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기독교는 이내 예수님이 불편해질 수 있다. 예수님이 가족에 대해 하신 말씀이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이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우리와 같은 편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속단할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7)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오늘날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데, 이는 대체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예수님이 살던 시대와 달리 우리는 길에서 사람들이 실제 십자가에 매달려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지는 않는다. 우리가 보는 ‘십자가’는 영적 헌신을 의미하는 편안한 은유일 뿐이다. 때로는 우리는 십자가를 삶의 스트레스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문구점 주인이 연말 재고조사를 “내가 지고 갈 십자가”라고 농담할 정도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가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hate)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6).

여름성경학교의 주제 성구로 이 말씀을 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결혼식이나 결혼기념일 케이크 장식 글자로 쓸 리도 만무하다. 이 구절이 조금이라도 어디서 언급된다면,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이 전혀 말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이 말씀에서 “미워하다”라는 말은 적대나 경멸이 아니라 애착의 우선순위를 뜻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말해 줄 필요도 있다. 그러나 C. S. 루이스가 이 구절을 두고 “두려워 떨며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에게만 유익하다”라고 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옳은 말이다. 루이스의 표현대로 “자기 아버지를 쉽게 미워할 수 있는 남자, 자기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평생 몸부림친 여자라면 이 구절을 피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시간을 별로 갖지 않는다. 특히나 이 구절만 절대 동떨어진 본문이 아니라는 관점을 우리는 고려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왜 이처럼 가족을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들리는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며,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 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가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노래했던 것처럼,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눅2:14)를 주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마10:34-36).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주요 가르침에서 잠시 샛길로 빠진 부분이 아니라, 폭풍에 휩싸인 세상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10:38-39)-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으시는 방식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예수님은 일말의 공감도 보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눅9:59-60). 

장래에 제자가 될 또 다른 사람이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이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9:61-62).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좋게 말해도 가혹하게, 나쁘게 말하자면 악랄하게 들렸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사교집단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의 하나가 바로 이것, 사교집단은 전형적으로 사람들을 가족과 단절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새로 들어온 신도들에게 부모나 형제들과 연락을 끊으라고 하는 집단은 유해한 집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다 보니 1세기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 운동을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자 어부 제자들은 즉시 그물을 내팽개치고 그를 따랐다. 마가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손질을 멈추고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막1:20)고 전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이를 가족과의 절연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물을 버리고 떠난 그 어부들은 다른 도시에 가서 새 직장을 구하는 현대인과는 다르다.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업으로 내려온 조상의 전통과 스스로를 단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미래의 후손과 그 후손의 후손, 앞으로 이어질 보이지 않는 세대를 위한 생계 수단까지도 포기하는 행위였다. 이것은 충격적인 반가족적 행위일 뿐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에 대한 위반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성경 전체의 요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성경 이야기는 가족-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사명을 받은 한 남자와 한 여자-과 더불어 시작한다(창1:28).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창17:5), 그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알과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창15:5). 또한 다윗에게는 그를 위해 왕조를 세우셔서 그의 아들이 영원히 왕좌에 앉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삼하7:4-17).

예수님은 그 어떤 상황과 문화에서도 놀랄 정도로 당신의 직계 가족을 방치하셨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가족 애착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그에 관한 가장 큰 논란거리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과 동족들이 그에게 보인 경악스러운 반응은 이상한 것이 없다. 그만큼 그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에 맞서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가정에 충실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이 가족들을 두고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미쳤다고 해서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 한 적이 있다. 예수님은 어렸을 때 마리아를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해 받들었으나 공생애가 시작된 후로는 더 이상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셨다. 

가족들이 와서 밖에서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반문하셨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눅8:21) 하시면서 예수님의 가족을 정의한다. 

육신의 혈통이 주님의 가족이 되는 것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 가족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들로 구성되는 영적인 관계다. 하나님을 알고 그 나라의 가족이 되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요 예수님이 새롭게 정의하신 가족의 일원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가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려 그의 생명은 꺼져가면서도 사도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을 가장 사랑해야만 한다. 예수님만이 제자의 모든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돼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그렇기에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생명을 다해 주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결론으로, 오늘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정말로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가족까지도 등져야 하는 희생을 요구한다면 제자 되는 것이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주님께 맡겨야 한다!

 

04.2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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