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부활주일 맞아 초대교회가 지켰던 절기 회복 필요성 제시
기독교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다. 사순절이 우리들의 과한 욕망을 제하고 죄에 물든 신앙을 정제하는 기간이었다면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참여하는 날이며 이 세상을 새롭게 할 궁극적 소망을 되새기는 날이다.
부활절에서 가장 최고조에 이르는 기쁨은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날 교회가 세례를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기쁨이다. 초대교회는 사순절에 세례후보자들의 신앙을 마지막으로 점검(Lenten Catechesis)하고 이를 통과한 이들에 한해 토요일 밤, 즉 부활절 전야를 지키며 기다렸다가 부활주일 새벽에 세례를 베풀었다.
온 교회가 사순절의 금식에 동참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림과 동시에 부활주일에 세례 받는 이들의 구원의 기쁨에 동참했다. 따라서 부활절 승리의 외침은 세례를 통해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가 이들의 기쁨과 더불어 온 세상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
부활주일로 시작돼 오순절 성령강림주일로 마치는 50일은 교회의 가장 오래된 절기로서 대림절과 사순절보다 더 오래된 절기다.
부연하자면, ‘기쁨의 50일(The Great Fifty Days 혹은 Eastertide)’은 부활사건이 유월절(Pascha) 때 일어난 이유에서 ‘파스카 절기’라고도 부른다. 원래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50일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에 하나인 오순절(Pentecost)에 해당된다. 그래서 현재 개혁교회들은 유대인의 오순절과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의 혼돈을 막기 위해 이 기간에 대한 명칭을 ‘기쁨의 50일’로 부르는 것이다.
‘기쁨의 50일’은 교회가 탄생하고 3세기 동안 유일한 절기로 지켜오다가 4세기에 이르러 분할되기 시작했다. 파스카 팔부(Pascha Octave)의 첫째 날이 되는 부활절을 시작으로 40째 날이 되는 ‘승천주일’을 거쳐 마지막 50째 되는 날인 ‘오순절 성령강림주일’로 끝이 난다. 다만, 정교회는 지금도 승천주일까지 40일을 부활 절기로 지키고 있다. 파스카 팔부는 ‘흰옷을 입는 주간’으로서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8일 동안 교리문답을 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이처럼 부활 절기는 그리스도 중심성을 연(年)주기로 재현하는 교회력 가운데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부활주일부터 오순절 성령강림주일까지 50일을 하나의 큰 잔치로 하여 축하하고 기뻐하면서 특별히 이 기간 동안에는 금식하는 것과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들은 7주 동안 계속되는 부활의 기쁨보다 사순절의 참회와 십자가의 고난에 치우쳐 이 절기가 갖는 완전한 승리와 기쁨은 부활주일 하루의 잔치로 그치고 만다. 교회가 시작되고 주님의 부활을 매년 기념하던 초기 크리스천들은 부활의 감격과 기쁨을 부활주일 하루의 행사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7주 동안 이 놀라움을 경험하고 누리면서 부활의 신비를 표현하였다. 따라서 교회공동체는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활신앙을 ‘기쁨의 50일’로 회복해야 한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는 이미 이러한 신학적 또는 교회력적 불균형을 지적했다:
“필자는 자주 우리의 ‘신학적 편식’에 관해 불평을 하곤 하는데, 그 편식의 가장 치명적인 희생물 중 하나가 부활이 아닌가 싶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는 열광하지만 부활에는 당황한다...교회에서도 십자가와 대속의 은총을 노래하는 찬송은 사시사철 불리지만, 부활을 환호하는 찬송은 부활절만 지나면 금방 ‘철 지난’ 캐롤처럼 어색하다. 예수는 고작 3일 동안 죽음 속에 있었고 이제는 부활하신 주로 계시는데, 우리에게는 늘 십자가가 더 생생하고 부활은 여전히 서먹서먹한 손님 같다. 하지만 갈보리 언덕에서는 고향의 편안함을 느끼면서 빈 무덤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우리의 영성은 과연 건강한가?
역사적 견지에서 말하자면, 교회의 실질적 출발점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보여 주듯,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에 대한 모든 기대를 끝장내는 절망이었다(눅24:21)...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어떤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부활이라는 실제 사건이었다. 절망한 제자들을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시킨 것은 문득 얻게 된 어떤 신학적 깨달음이 아니라 부활의 충격, 곧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와의 맞닥뜨림이었다. 이 만남 속에서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고, 이 부활의 빛 아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 초대 교회 최대의 키워드는 부활이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목사도 “부활이 구원의 완성”이라면서 “우리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구원은 몸의 부활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라면서 “그 사실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이유”라고 들었다.
존스 목사는 “돌아다니면서 몸의 부활이 없고 영적인 부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실제로 ‘여러분에게 처음 왔을 때 전파한 이 믿음에 굳게 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전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
결론으로, 부활이야말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이며, 개인과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 세상을 기쁨으로 춤출 수 있게 하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둠을 빛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살릴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절은 단지 그날 하루만 신앙인들끼리 기뻐하는 날이 아니다. 부활절이 됐다고 삶은 계란 나누는 것만이 기독교 문화가 아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부활의 의미와 정신을 지역사회에 전하고 생명의 축제를 여는 것이 부활의 문화다.
이제 부활주일로부터 오순절에 이르는 기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며 생명의 문화를 함께 나누는 ‘기쁨의 50일’로 만들 때다.
<편집부>
04.1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