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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으로 담금질해 사랑을 전하라!

‘2019 고난주간 맞아 그 의미와 명화(“이 사람을 보라”) 통해 크리스천의 자세 소개

사순절의 절정에 이른 고난주간이 진행되고 있다. 이 고난주간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의 개인의 경건 차원을 넘어 서서 인간의 죄와 고통의 현장에 찾아와 주시는 고난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는 단순히 경건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와 고통 가운데 있는 그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주간 중에는 종려주일, 세족 목요일, 성 금요일, 성 토요일 등이 포함돼 있다.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이었던 이 고난주간에는 예루살렘 입성, 성전 숙청, 감람산 강화, 성만찬 제정,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체포와 심문, 십자가 처형과 장사 등 그야말로 예수 공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과 전 우주적 사건이기도 했던 대사건들이 숨 막히게 전개됐다. 이에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 응축적으로 담겨있는 이 주간의 각 요일마다 그 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기억하며 한 주간을 엄숙한 절기로 보내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한 의로운 인간의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태초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워진 구속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구속주가 당하신 전 우주적 고난이었다.

성경에는 패러독스(paradox)가 있다. 패러독스는 겉으로는 어불성설인 것 같지만 진실을 파고들면 그 안에 진정하고도 깊은 의미가 스며있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자기를 죽이면 살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자기를 부인하라” 그리고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죽으면 많은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런데 패러독스는 성경에서 신앙인들을 보다 깊은 영적 의미로 안내하는 계단이다.

고난은 그런 의미에서 깊고 깊은 역설을 함축하고 있다. 고난은 보통 사람들이 회피하는 사건이다. 고난은 사람을 괴롭히고 실망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난을 피하려고 한다. 고난을 안 만나면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인생에 고통이 없다면 얼마나 즐겁고 기쁘겠는가.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못하다. 고통과 고난이 도처에 사나운 맹수처럼 도사리고 있어 불안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영성을 준비하도록 말씀하는가. 고난이 없는 인생인가, 아니면 고난을 극복하는 인생인가?

성경은 고난을 역설로 배우라고 가르치신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 때문에 감사하다는 표현은 참으로 신비한 영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고난에 절정과 극치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를 극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야의 고난이 한 개인의 비극으로 끝맺는 허망한 연극이 아니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우주적 사건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고난과 역경이 사람의 역량을 키우고, 그 사람이 지닌 역량은 역경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그리고 고뇌하게 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 역시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고백했다. 시련 앞에 무너지지 않고 원만히 견딜 수만 있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삶에 있어 독이 아니라 득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내재적 가치다.

인생이란 긴 여로에서 만나는 수많은 난관은 그런 의미에서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과 극복의 대상이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축복이다. 고난으로 자신을 담금질한 사람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삶의 무늬를 갖게 된다.

성경 즉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받으시는 고난을 아주 실제적으로 그려낸 화가가 있다. 스위스 출신으로 인상주의가 유행했던 19세기 말에 성화를 그린 사람 안토니오 치세르(Antonio Ciseri, 1821-1891)다. 

그의 작품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그린 장면이다. 요한복음 19장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혔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별다른 죄목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지난밤 흉몽으로 인해 예수님을 놓아주자고 한다. 빌라도는 마음이 다급해져 절박한 심정이 됐다. 급기야 그는 유대 군중을 향해 팔을 벌려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오’라고 외치며 (난감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을 마치 스냅 사친처럼 찍어 화폭에 담은 주인공이 안토니오 치세르다. 그는 라파엘로 화풍을 이어받아 사진보다 더 섬세하고 매끄러운 초상화들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거대한 로마제국의 강력한 힘 앞에 아무런 저항할 것도 없이 무기력하게 서있는 예수님을 묘사했다. 그 앞에 빌라도는 금빛의 화려한 로마귀족 옷인 토가를 걸치고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정당함과 결백함을 맹세하듯 한 쪽 손을 들어 표시하고 있다. 

반면에 힘과 승리의 상징인 빌라도 앞에 대조적으로 힘없이 초연하게 서 있는 예수님을 그려놓았다.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그동안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담대히 말씀을 전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듯 한 단호한 표정이다.

예수님 뒤에는 창과 칼로 당당하게 서 있는 로마병사와 그들의 반대편엔 평소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네들이 있다. 그들은 강한 권력과 무력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빌라도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은 얼마 전만 해도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며 환호했지만 이제 그들은 ‘예수를 못 박으라’고 핏대를 올리며 외치고 있다. 빌라도의 오른쪽에는 죽음 직전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바라바가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있는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의 배경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강력한 로마제국 수도를 배경으로 해서 예수님과 빌라도를 더욱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마치 당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섬세함과 진지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 유대 군중 속에 있는가? 아니면 여인들과 함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빌라도의 자리에서 우유부단하게 결단하지 못하고 군중에 이끌리듯 세상의 가치에 이끌려 고개 숙인 자일 수 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라고 외치는 소리에서 거대한 로마제국의 힘이 아닌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봐야만 한다. 

결론으로, 존 파이퍼 목사는 자신의 대표작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고난주간을 온전하고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지혜를 전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난을 통해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리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인 십자가를 전할 때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보고 우리를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기 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겪는 고난을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실재로 느낄 수 있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04.0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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