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오는 10/19일은 고(故) 최찬영 선교사가 소천하신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 분은 명예롭게도 해방 이후 한국교회가 타문화권에 처음 파송한 선교사로서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최 선교사님은 한인 세계 선교 역사에 귀한 족적을 남기셨다. 시대가 혼란스럽고 어려운 지금 우리는 본이 되신 고인(故人)의 바톤을 이어받아 사역에 매진하기를 기대한다. 그 분의 생애와 인격 그리고 사역적 열매는 어떠한가? 해방 후 한국교회의 첫 선교적 열매로서 앞서가신 선교사님을 회상해본다.
1. 최 선교사의 어린 시절
최찬영 선교사는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나 만주 땅 연길에서 성장했다. 1945년 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이 되자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친구와 어머니의 권유로 1948년 남산에 위치한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나고 인민군에 잡혀 3번이나 죽을 고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주셨다. 9·28 수복 후 육군 군목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타고 갔던 트럭이 3m가 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휴전되고 1954년 최 선교사는 독립운동가로 순교한 김예진 목사의 딸이자 의사였던 김광명 사모와 결혼했다.
2. 선교사로서 결단
최 선교사는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55년 풀러(Fuller) 신학교 장학생 자격으로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아내 김광명 여사(2017년 작고)도 LA 카이저 메모리얼 병원으로부터 수련의 제의를 받아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선교부 관계자가 찾아왔다.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려고 하는데 최 선교사가 혹시 태국 선교에 뜻이 있는지 물어왔다. 그는 아내와 밤새 논의한 끝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선교의 길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공부하는 길은 다시 열릴 수 있지만 주님이 부르시는 선교사의 길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이 아닌가. 나는 덤으로 살아왔는데 주님이 부르신다는 데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국민일보 인터뷰).
최찬영 선교사는 해방 후 한국교회의 제1호 파송 선교사였다.
그 분은 인격이 고매하고 삶이 깨끗하며 성경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하나님의 킹덤을 앞세우며 늘 연합을 강조한 최 선교사는 국제신사이셨다.
3. 선교사 파송 시 한국의 상황
최찬영 선교사 부부는 1955년 4월 24일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는 영락교회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해외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한 나라였다. “1956년 한국의 개인 GNP는 66불이었다. 태국은 138불이었으니 태국 국민 소득이 한국의 두 배가 넘었다. 미국은 2,674불이었다. 숫자로만 보면 미국은 40배 이상인 셈이다.” 사실 6.25 이후 한반도는 피폐한 상태였다. 한국은 재정적으로 미국에 의존적이었다. 한국 전체 수입의 13%와 한국 정부 예산의 40%이상이 미국정부의 지원이었다. 미국에서 밀, 보리, 쌀 등 도움이 없었다면 생존이 어려운 시대였다. (최찬영 인터뷰).
4. 선교사로서 태국 입국
1956년 6월에는 한국에서 태국으로 직접 연결되는 항공편이 없었다. 우선 비행기로 홍콩에 도착한 뒤 방콕까지 배를 타고 들어갔다. 사모는 임신한 상태였다. 당시 태국은 한국에 비해 여러 모로 발전한 나라였다. 코 큰 서양 선교사를 기대했던 태국 현지인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며 멸시 섞인 태도로 대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가 언어를 배우고 1년 만에 태국어로 공중설교를 하게 되자, 비로소 그들은 선교사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내가운데 어려움을 하나씩 극복하고 BIT신학교 교수, 방콕 제2태국인교회 담임, 방콕 기독교 병원 원목으로 활동하다 태국성서공회 총무 직을 감당하게 되었다.
5. 최 선교사의 중점사역
그는 1962년 6월부터 아시아인 최초로 태국·라오스 성서공회 총무로 봉사했다. 1978년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무로 취임해 1992년까지 성서공회를 통해 성경 번역, 인쇄, 반포에 주력했다. 그의 전체 37년의 선교사역중 30년을 성서공회에서 섬겼다. 특히 그가 총무로 섬기는 동안 기적 같은 일이 중국에서 일어났다. 외부에서 성경 반입이 불법인 중국에서 세계 최대의 성경공장이 세워진 것이다. 그는 1987년 12월, 애덕기금회(愛德基金會: Amity Foundation)를 통해 중국 남경에 성경 인쇄공장을 설립하는데 산파역할을 하였다. 그 공장을 통하여 2019년까지 2억 권의 성경이 인쇄되었다. 9천만 권은 중국인을 위하여 나머지 1억 1천만 권은 다른 지역을 위하여 배포되었다.
6. 은퇴 후 사역
최 선교사는 37년 동안 사역을 마치고 1992년 2월 66세의 나이로 은퇴를 결심했다. 그러나 말만 은퇴지 사실상 선교사로서의 제2의 인생이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은퇴 이후 미국 풀러 선교대학원 한국학부 책임자로서 5년간 연봉 1달러만 받으며 신학생과 후임 선교사 양성에 힘썼다. 옛날 청년시절 태국 선교를 위해 포기했던 꿈이 약 40년 만에 이뤄진 셈이다. 2009년에는 LA 또 감사 선교교회를 통해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부산 해운대에 터를 잡고 전세계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을 돌봤다. 2017년부터는 Son Ministry 김정한 선교사를 도와 “황금기 선교사 운동”을 펼쳤다. 그 분은 이렇게 눈을 감을 때까지도 선교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7. 어록(語錄)과 바램
최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귀한 말씀을 남기셨다. "선교란 모든 사람 입으로 주를 시인토록 하는 것이다. 선교는 민족주의나 제국주의가 아니라 신국주의 이다. 선교란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입어 우리와 같이 되신 것처럼 원주민과 같이 동화될 수 있는 성육신의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선교지 현지 교회가 없거나 아예 협력선교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독자적이고 독립적으로 개척선교의 길을 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는 한 현지 교회와 함께 일을 해야 한다.
8. 맺음 말
최찬영 선교사는 2021년 10월 19일 오후 6시 50분(미 서부 Time )에 LA 굿 사마리탄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96세였다. 그는1992년 은퇴까지 37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교사로서 교단이나 국가를 초월하여 활동을 하였다. 특히1978년부터 15년 동안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성서공회 총무로서 성경 번역, 인쇄, 보급에 힘썼다. 최 선교사는 은퇴한 후에도 원로로서 후진양성과 각종 집회에서 말씀강사로서 귀한 사역을 하셨다. 고인의 사역 내용도 자랑스럽거니와 무엇보다 사람을 좋아하시고 누구를 대하든 편하게 맞아주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고매(高邁)한 인격의 소유자이셨다. 최 선교사님을 본받는 제 2, 3의 선교사들이 줄지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Jrsong007@hanmail.net
10.12.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