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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화약고(火藥庫)인 팔레스타인 땅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팔레스타인 땅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의 전쟁이 확전으로 비화될 위기에 놓여 있다.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인 “이스마일 하니예(Ismail Abdel Salam Ahmed Haniyeh)”가 7/31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이 사건이 있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최고 군사 사령관 “푸아드 슈크르”를 사살했다고 공개했다. 이로써 사람들은 제5차 중동전이 발발하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익히 아는바, 팔레스타인 땅은 유사 이래 지금껏 끊임없는 긴장과 싸움으로 점철되어 왔다. 우리는 인체의 한 부위에 조그마한 상처가 있다 해도 그 통증은 전신으로 퍼진 경험들을 갖고 있다. 인류는 미우나 고우나 한 운명 공동체이다. 따라서 기독 교회는 지구촌의 화약고(火藥庫)인 팔레스타인 땅에 평화가 정착되도록 온갖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그 첫걸음은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팔레스타인 땅과 관계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기 때문이다(George Gordon Byron 시인). 1. 팔레스타인 땅의 지명의 변천 과정 “팔레스타인”이란 지명은 필리스틴(םיתִּשְׁפלְְּ)이란 단어에서 근원되었다. 필리스틴은 미케네 문명 당시 남부 그리스에서 이주했던 필리시테인(블레셋 사람)을 가리키던 명칭이다. 한편 성경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을 세우기 전에 이곳을 가나안(ןעּנכ)이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성지, 약속의 땅"이다. 이는 다소 은유적 표현으로서 구약 성경에서 20차례 언급되었다(민13:27, 수5:6). 팔레스타인 이름이 정착된 계기는 AD 70년경부터이다. 당시 패권적 국가였던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 로마는 유대인들을 사방으로 흐트러뜨린 뒤,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말라는 의미로 저들이 원수로 여기던 블레셋 족의 이름인 “팔레스타인”이란 지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로써 유대인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로마제국 전역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신세가 되었다. 2. 팔레스타인 땅의 지정학적 의미 팔레스타인 땅은 일반적으로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와 그 인근 지역을 일컫는다. 이 땅은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교차하고 유럽이 지중해를 통해 맞닿은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땅은 3개 대륙의 힘과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문명의 교차로로서,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서,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의 교역로로서, 세력 간의 각축장(角逐場)으로서 그리고 종교의 발상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여기서 의문점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그 후손들을 왜 가나안(팔레스타인) 땅으로 인도하셨는가? 에 관한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에덴동산으로 추정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만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상류나 아니면 이집트 나일강 유역이 더 타당하다. 더구나 팔레스타인 땅은 주변 강대국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물이 넉넉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은 구지 절대자를 의존하지 않아도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천수답(天水畓)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의존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땅은 천수답에 해당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선민으로서 사람이나 땅을 의지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는 신학적인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들 역사에서 여호와를 얼마나 의뢰하면 절대 신앙으로 살았느냐? 에 따라 행, 불행이 엇갈렸다. 3. 팔레스타인 땅의 지배구조 역사(wikipedia.org 참고)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발굴된 유적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인 대략 60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카난인(가나안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 시리아, 페니키아 및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성서에 따르면 히브리 민족은 출애굽 한 후 B.C. 1406년에 가나안 땅에 진입했다. B.C. 1050년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시작되었다.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왕국은 B.C. 930년경에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다. B.C.722년에는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였고, B.C. 586년에는 남쪽의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에 멸망하였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고 일부는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 있었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 (B.C. 538년~B.C. 330년) 기간에 유대인들은 다시 돌아왔다. 헬레니즘 계열 왕국의 지배 (B.C. 330년~B.C. 63년) 후 로마가 지배했다 (B.C. 27년~A.D.476년). 연이어서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330년~638년). 아랍 칼리파의 지배 (638년~1516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6년~1920년), 영국의 지배 (1920년~1948년)로 이어졌다.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사이가 점점 악화되자 1947년 유엔은 주민 투표로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채택했다. 유대인들은 이 결의안을 환영했으나, 아랍인들은 반대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영국의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상 열거한 역사처럼 팔레스타인 땅은 계속적으로 여러 제국들의 말발굽 아래서 짓밟혀 왔다. 오호통제(嗚呼痛哉)라! 지구촌의 80억 인류는 공동 운명체이다.. 몸 한 곳이 아프면 통증이 전신으로 퍼지듯 인류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팔레스타인 땅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 들도록 제 역할을 해야 한다. 4.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한 세기가 넘는 동안 그 땅을 자신들의 영토로 공인받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고 피를 흘려왔다. 그간 두 공동체는 서로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만 집중하면서 분열을 더 심화시켜 왔다. 그 와중에 양측은 모두 고통, 슬픔, 분노, 트라우마,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다. 이런 상황에 대해 역사학자 라시드 칼리드(Rashid Khalid)는 지금은 ‘1917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분쟁 과정 속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분쟁의 땅과 세력에 대한 기독교회의 관점은 무엇인가? 복음주의 계열로서 대표되는 로잔 운동(Lausanne Movement)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고, 화평케 하며,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과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산 증인이 되라는 하나님의 사명에 따라 살지 못하는, 실패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갈등과 고통의 시간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들을 내려놓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짐을 나누라는 사명을 받았다.” 우리의 기대와 소망은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거민이 진정한 화해가 이뤄지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미래를 구축하는 것이다. 5. 맺음말 화약고(Powder Keg)는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국가간 분쟁이 발생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국경선 이해, 자원 획득, 민족적 갈등, 이념의 대결, 종교적 대립, 강대국의 간섭 등이다. 팔레스타인 땅에 갈등과 대결이 끝이 없었던 것은 여기 언급한 요소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좁은 땅, 한 지역 안에 모든 것이 다른 두 민족이 살고 있다는 것은 갈등을 촉발할 수밖에 없다. 자기 논리와 감정으로 나아가면 해결점이 없다. 이제 UN을 비롯하여 국제사회가 서로 윈윈(Win Win)하는 노선에서 가름 마를 타 주어야 한다. 비록 골 깊은 상처와 미움이 극에 달한다 해도 인류는 한배를 탄 공동 운명체라는 틀 안에서 접근하면 얼마든지 평화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독교 교회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동질성 없는 태도를 버리고 주체적으로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42)를 통해 행동하는 신앙을 강조하셨다. 天下无难事,只怕有心人(하늘 아래 난제가 없나니 오직 마음먹기에 달려 있느니라.)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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