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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면류관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인류의 최대 스포츠 축제인 하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제1회 대회는 1896년 4/ 6-15일까지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렸다. 그 이후 벌써 33회째가 되었다. 금 년 대회는 프랑스 파리에서 7/ 26 ~ 8/11일까지 총 17일간 진행된다. 참가국은 206개 나라이다. 출전선수는 329개 종목에 10,714명이다. 슬로건은 “함께 나누자(Made for Sharing)이다. 프랑스로서는 1924년 파리 하계 올림픽 이후 100년 만에 다시 대회를 주최하고 있다. 수많은 경기 중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종목이 있다. 바로 마라톤(Marathon)이다. 이는 육상 경기의 한 종목으로, 42.195Km (26마일 385야드)의 거리를 달리는 도로 경주이다. 마라톤은 인간의 극한 한계성을 시험하게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썩지 아니할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해 상을 받도록 달음질을 하라고(고전9:24-25) 권면한다. 또한, 디모데후서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고 자신의 삶을 달리기 경주로 표현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하게 인생을 장거리 경주에 비유하고 있다(히12:1-2). 그렇다. 우리 인생도 어쩌면 한평생 달려야 하는 마라톤과 같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림

 

승리의 첫째 비결은 먼저 준비 단계에 있다. 모름지기 운동선수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달리기 경주에 임하는 선수가 넥타이에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채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선수가 우승 경쟁을 하려면 최대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 던져야 한다. 대개 남자 선수들은 팬티만 입는다. 어떤 수영 선수는 공기와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머리털까지 빡빡 밀기도 한다. 인생 레이스(Race)도 승리하기 위한 원리는 스포츠와 비슷하다. 여기서 모든 무거운 것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짐, 방해물”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탐욕으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물질,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냉장고, 옷장, 거라지 안을 보라. 적어도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면 필요한 이웃들에게 기부(Donation)하는 것이 좋다. 보물을 움켜쥐기보다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한다(마6:19-21).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 학자인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를 언급했다. 그는 현대인들의 가장 큰 착각은 소유에 늘림으로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유하는 삶보다 존재를 중시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하나 “얽매이지 쉬운 죄”란 무엇인가? 이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데 있어서 불 신앙의 요소를 말한다. 이를테면 이리저리 얽힌 인간관계, 나쁜 중독성 습관, 세상 유혹, 인터넷이나 핸드폰을 통한 여러 악성 요소들이다. 인생은 다 때가 있다. 더할 때와 뺄 때를 잘 분간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중년이 되기까지는 더하기 위해 힘쓴다. 지식, 재물, 권력, 명예, 인간관계 등이다. 그러나 60대 장년부터는 빼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무거워 경쾌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이 세상에 자기 소유물을 생전에 스스로 처리하면 지혜로운 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자기가 죽은 후 다른 사람에 의해 처리되면 어리석은 자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 이를 위해서는 나무를 전지하듯 인생 달음질에서 방해된 것들은 과감히 정리하는 것이 행복의 첩경이다.

 

2.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함

 

승리의 둘째 비결은 경주시 그 태도에 달려 있다. 오직 일념으로 몸과 마음이 집중해야 한다.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차 있으면 잘 달릴 수 없다. 육체는 마음의 영향을 받고 마음 또한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하나님께서는 똑똑하고 지식 있는 자보다 매사에 성실한 사람을 쓰신다. 택함을 받은 열두 제자들이 그러했다. 또한, 달리기 경주 상에 있는 선수는 인내해야 한다. 처음 출발 선상에 있는 선수들을 보면 모두가 1등 할 것 같다. 눈빛이 빛나고 소망이 있다. 허나 경주 휘슬이 울리고 나면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많은 이들이 중도에 포기한다. 비록 달린다 해도 다리가 천근만근처럼 무겁다. 한마디로 인내의 싸움이다. 이렇게 인내가 필요할 때 사람들은 인내를 잘 못 한다. 인내를 가장 잘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끝까지 인내하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께서 원수 같은 죄인들을 확 쓸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여기 말씀처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침묵하였음이여”(이사야 53:7) 끝까지 인내하셨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 본문에 등장한 “인내(휘포모네)”는 맞닥뜨리게 된 시련 앞에 그저 체념하며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며 곤란한 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인내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내주하신 성령의 능력을 덧입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한계적이어서 자기 힘을 의지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운동선수이든 인생이든 우리 모두는 승리를 갈망한다.

승리는 준비된 자가 인내 속에서 푯대를 향해 달려갈 때 일어난다.

선교사역도 소명과 은사를 따라 목표를 향해 집중할 때 열매가 있다.

 

3.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봄

 

승리의 셋째 비결은 자나 깨나 목표물을 직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넓은 운동장에서 푯대를 바라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걸어가면 엉뚱한 곳으로 가기 마련이다. 이로서 42.195 Km를 경주하는 마라톤 선수는 항상 그 골인점을 생각하며 힘의 안배 가운데 달린다. 인생의 근본적 푯대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하루 일과 속에서도 때로는 일 속에 파묻혀 주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곤 한다. 그러면 그 하루가 무질서하고 성취도가 낮다. 만일 우리가 나아 갈 목표점을 똑바로 주시하면 그것은 우리를 곧은길로 인도한다. 우리는 세상 썩어질 것에 마음의 중심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생각하고 바라본다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우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서 “믿음의 주”와 “온전하게 하시는 이”의 의미는 주님만이 우리 인생길에 온전한 모범이 되신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라보자”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론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 “계속해서 주목하자”란 뜻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곳에 가치를 두며 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서약이 내포되어 있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치욕적인 장애물도 피하지 않으시고 인내 가운데 결국 부활이라는 결승점에 다다르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이로써 우리는 앞서가신 주님께 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만을 주목하며 발자취를 좇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승점에 도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맺음말

 

지금 파리 올림픽 열전이 한창 진행 중이다. 금빛 메달을 딴 선수들은 그 나라에서 영웅 대접을 받게 된다. 하지만 패한 선수들은 설 자리가 없다. 찬밥 신세가 된다. 아무런 보상도 없다. 경쟁 사회는 냉엄하다. 승자는 칭송을 받을 것이요, 패자는 질타를 받기 일쑤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메달을 딴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만의 뭔가 승리 요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승리자는 결코 우연히 탄생하지 않는다. 인생 마라톤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상급은 행하므로 받는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우리 인생을 어떻게 경주하면 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으며 주께로부터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비결은 간단하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여호와 닛시(Jehovah-nissi)!

Jrsong007@hanmail.net

 

08.0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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