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사모 (CMF사모사역원 원장)
대망의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 제법 설레었습니다. 금년에는 무슨 일들을 벌리실까 기대가 되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내심 생각하며 벅찬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한 것들은 모두 반전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조금 쉬면 지친 몸이 곧 회복되리라 기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서 반란을 일으키듯 육체는 고장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어디든지 사모님들이 오라고 하는 나라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지만 몸이 허락치를 않습니다. 마음도 따라서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도 쌩쌩 달려도 끄떡없었던 몸도 이제는 옛날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몸마저 가눌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이렇게 약해진 자신을 받아드리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애써 자신을 달래가며 올해는 안식년으로 쉬라고 하시는가보다 하며 해외사역을 모두 접기로 하였습니다.
솔개의 선택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솔개는 40살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산으로 높이 날아가 홀로 앉아 바위에다 자기의 주둥이를 짓이겨서 빠지게 한답니다. 새 주둥이가 나올 때까지 고통의 시간을 감수하면서 견딘답니다. 그런 후엔 그 주둥이로 자신의 깃털을 모두 뽑아 버린답니다. 손톱도 다 뽑아 버린답니다. 다시 새 깃털과 발톱이 나올 때까지 홀로 외롭게 앉아 기다린답니다. 긴 세월을 고통과 함께 기다리는 동안 새로운 깃털이 나오며 발톱도 새것으로 다시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 다시 날기 시작하여 후반부의 생애를 멋있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문득 솔개와 같은 심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역하면서 낡아버린 나의 깃털, 주둥이 그리고 발톱 등을 모두 뽑아 버리고 새로운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기 시작합니다. 하찮은 것 같이 여겨지던 외로움이 다시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존재감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을 느끼는 시간들이었습니다. 20여년 전에 다 겪어본 감정들이라 생각되어 잘 견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모들이 눈에 아른거려 견디기가 힘든 시간들이 흘러갑니다. 에너지가 바닥이 나니 어느 누구에게도 전화할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자 외로움의 농도는 점점 짙어져 가기만 합니다.
원로목사님의 심정을 새삼 알 것 같았습니다. 은퇴사역자님들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섬기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됩니다. 홀로서기를 잘하는 자신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우리 자신들의 존재는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항상 강조하며. 이렇게 사모들을 위로하고 사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사역에 몰두해왔는데, 그러기에 나는 이런 부분에 도사가 된 줄 알았는데, 이런 구덩이에 빠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허탈감이 찾아옵니다. 사모들 앞에서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을 항상 격려하며 강조해 왔던 자신이 스스로 부끄럽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역자들의 탈진 상태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름을 또 다시 절실히 느끼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사역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고, 모든 가치를 사역으로 기준하고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남편의 도움 없이는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자 나의 나약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이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우울증을 앓게 되나 봅니다. 머리로는 잘 알고 이론으로도 잘 가르칠 수 있었지만 실제 상황 앞에서는 여유있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사모들 앞에서 나의 앞모습만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식년을 갖게 되면서 나의 뒷모습이 여실히 드러날 때 나의 자존감도 따라서 무너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역을 통해 항상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였고 사역의 결과를 갖고 인격까지 평가해왔던 자신이 드러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사모들의 우울증을 항상 염려해주면서 그들을 위로해주기 바빴고 치료하느라 온 정력을 다 기울여왔던 과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지금은 입고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역을 하는 동안 행복을 느끼던 감정은 이제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느낄 수 있던 행복감은 아득한 과거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한없이 서글퍼집니다. 누구에게도 대화의 내용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스스로 고립되어 투병생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솔개를 묵상하면서 “그래, 새 깃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 홀로 산꼭대기에서 지내야 하는 솔개가 나의 선생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 나오는 깃털 갖고 다시 날을 수 있는 시간들이 내게 꼭 올거야” 하며 달래곤 하였습니다. 목회자가 한창 사역하다가 그만 건강을 잃어버려 죽을병에 걸리게 되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까 절감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의사는 쉬어야 한다고 하지만 참된 쉼을 누릴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사역자가 아닌가 합니다.
도대체 믿음이란 정체가 무엇이기에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한평생을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몸도 돌아 볼새 없이 열심히 뛰어오다가 정작 자신이 병에 걸리면 그 믿음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들입니다. 참 믿음을 강조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힘입어 열심히 사역할 때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믿음을 세워주며 그 믿음으로 병을 이기고 일어나게 하는 능력자들이 자신이 정작 병에 들면 그 믿음은 다 어디로 가고 스트레스만 잔득 남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엘리야, 모세, 요나, 삼손 등 큰 일을 한 사역자들일수록 골짜기는 더욱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현대병으로는 심한 우울증환자들이었습니다. 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안식년이라는 별명아래 쉰다고는 말하지만 막상 아파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하루하루의 생활은 나를 절망의 늪으로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와중에도 더 맘이 아팠던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사정을 그대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나를 이해하는 이가 한사람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대화할 때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체질을 가진 자로서 혼자서 하루를 병과 싸우기란 심한 고문의 일종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하루 속히 병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집념은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로 나를 억압해왔습니다. 내가 갖고 있던 낡은 깃털과 주둥이를 몽땅 뽑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잠겨 열심히 뽑아 버릴 것들을 나열해봅니다. 참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모사역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프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해져 있습니다. 원고를 보지 않아도 사모들 앞에서기만 하면 절로 나오는 강의안들 청중을 맘대로 휘어잡는 기술도 늘어갑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모들의 허물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순수한 사랑이 식어져가는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모들은 왜 그렇게 선물을 좋아할까?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많은 짐을 들고 다녀도 알아주는 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이 느끼며, 더 나아가서는 선물에 대한 불만까지 얼굴에서 보여질 때 마땅히 섬겨야 할 사모들이 슬슬 미워지기 시작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아! 이제는 나는 더 이상 순수한 사랑이 나올 수 없는 사역자가 되는가 보다!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 아닌가! 꽃은 떨어지기 싫고 열매만 바라는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존심의 꽃이 떨어져야 비로소 인격에 열매가 맺혀 지는 것인데... 그러기에 나는 더 이상 프로가 아니고 ‘꾼’으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오늘도 오래되고 낡아버린 깃털과 주둥이를 뽑기 위해 “사모들을 섬기는 꾼“의 이름표를 떼어버리기 위해 몸부림 쳐봅니다. ▲이메일:hwangsun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