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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면 달라집니다

(마가복음 10:46-52)

조성근 목사 (갈멜산 금식기도원 담임)

오늘 본문에 등장한 바디매오는 예루살렘을 찾는 많은 순례자들이 오가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입니다. 그의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쌍하게 보여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그는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모역시 그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의 이름이 바디매오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자식들을 위해 보모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이름을 지어주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된 어느 날부터 만남과 자유의 그날을 흠모했고 어느 곳에서든지 갈망했고 마침내 기다렸던 그날이 왔을 때 전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로 바디매오가 달라졌습니다. 1)보게 되었습니다(52절) 누구라도 볼 수 없는 문제가 예수님의 의해 해결되었습니다. 동냥으로 오늘을 근근이 살 수밖에 없던 그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어두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빛을 얻게 된 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2)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구걸을 위해 길가에 앉아있던 바디매오가 이제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증거를 지니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은혜를 입은 그는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살기로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힘있게 예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사람으로 달라졌습니다.

3)희망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기록된 바디메오의 일은 오늘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합니다. 빛에 대한 희망이고 고침에 대한 소망이고 내일에 대한 꿈입니다. 그리고 탄식 속에 있던 이들은 의욕을 갖게 되고 절망 속에서 헤매는 이들은 비전을 품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주님께 옮기게 하고 그들도 달라질 수 있음을 확신케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1)예수님은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아버지조차 내일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을 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비참한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버지라도 자식에 대하여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것이라도 예수님 앞에선 절망할 일이 없습니다. 또한 어떤 누구라도 우리 자신의 일을 함부로 평가 할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과 예수님은 전혀 다르십니다. 디매오는 바디매오의 아버지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디매오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지만 예수님은 그 아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셨습니다.

2)예수님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길가에 앉아있는 거지를 향해 동정을 베푸는 것은 아름다운 선행입니다. 불쌍하다고 말하면서 지나치는 이들에 비해 몇 푼이라도 적선하는 손길을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인생을 책임져줄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바디매오의 인생을 바꾸어주셨습니다. 무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경과 관계로 더 나은 내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나 더해진 상처만큼 예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줄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을 주시고 풍성하게 하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예수님은 세상과 달랐습니다.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속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충분합니다. 길거리에 앉아 있는 거지라도 내일이 불투명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도 믿으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1)우리도 소원이 있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문제를 만나도 같은 소원은 아닙니다. 맹인 바디매오의 소원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더 많은 동냥을 얻기를 소원할 때 그는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원했습니다. 방법이 없는 환경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세월에도 여전한 소원이었습니다. 마침 무리와 함께 바디매오 앞을 지나시던 주님이 부르짖는 바디매오의 음성을 들으시고 오라 하시며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 원하느냐?”하셨을 때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늘 품어왔던 소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분에 넘치는 소원이라 할지 모르나 결국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소원이 있으면 됩니다.

소원은 품으면 이루어집니다. 불순한 목적이 아니라면 됩니다. 주안에서 품은 소원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품은 소원은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것은 이루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원은 품고만 살아도 행복합니다. 삶이 곤고한 것은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목표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늘을 사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 칠년 동안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 소원은 나를 바꾸어 줍니다. 소원이 나를 만들어갑니다. 건강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식습관을 바꾸게 됩니다. 운동을 위한 하루의 일과가 달라집니다. 요사이 좋은 성적을 소원하는 학생들은 흔한 스마트폰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2)우리도 믿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님으로 부를 때 그는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을 믿은 것은 나사렛 예수님을 오실 메시야로 확신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밝은 희망이 헛되지 않았던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었듯 우리도 믿으면 됩니다. 주님은 믿음대로 되게 하십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믿었고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마9:27-30에 나오는 두 맹인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심 역시 너희 믿음대로 되라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라기 아닌 길가에 앉아 믿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바디매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직 믿는 자에게만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를 쓰십니다. 바디매오를 통해 사람들은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믿음 있는 자를 통해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해 전쟁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3)우리도 기도하면 됩니다.

믿어지는 사람이 소원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연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믿어지는 사람만 기도할 수 있고 가슴에 담은 소원은 부르짖음으로 표현됩니다. 기회를 좆아 기도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시력은 잃었으니 청력은 누구보다 예민했던 그는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구걸하던 목소리가 이제는 기도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혼치 않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마침내 주님은 지나치지 않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절박한 처지에서 없는 기회도 만들어야 하는데 주신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도전을 넘어 기도해야 합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에 많은 사람이 꾸짖습니다. 기도의 난관입니다. 응답을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만나게 되는 장애물 입니다. 뛰어넘어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기대하며 시작한 기도를 멈출 마음이 없었습니다. 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도 그의 기도의 시선은 오직 주님께 있었습니다. 주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기만을 위해 기도하던 그는 주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의 기도 목적은 많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함이 아니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의 중언부언과도 달라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확실하게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도 달라질 수 있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고 소원을 품고 갈망하며 기도하면 달라집니다. 곧 우리가 달라지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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