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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일수록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장 1-2절)

노기송 목사 (뉴욕새예루살렘교회)

서론

오늘 본문은 앞장 11장에 나오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선진들의 승리 이야기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이나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나, 오직 구원의 본질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본주의가 판치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의 영적 풍조는 믿음보다는 행위에 더 관심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이번 천주교 교황이 한국을 다녀가면서 그가 남긴 여러 가지 행동에 한국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고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려고 아우성들이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그런 모습들을 보며 참으로 마음이 찹찹했습니다. 우리가 정작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의 사회나 정치나 기독교계의 너무 한심스런 일들로 실망한 백성들은 눈앞에 보이는 교황의 제스쳐에 모두 정신들을 잃었습니다. “명량” 또한 대한민국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흔히 본 이순신장군의 영화이건만, 오늘날에 방영되는 “명량”에 온 국민들이 넋을 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 소문에 나 역시 뉴저지에서 웨체스터 지역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첫날 첫 방영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어릴 적 보았던 내용과 별반 다를 것이 없건만, 이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요즘은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며 바라볼 지도자, 히어로(영웅)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백성들의 마음에 삶의 기준이 되는 기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계속해서 나타나는 사회나 정치나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의 불법과 거짓과 속임수에 이제 백성들은 모두가 식상해 있고,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누구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사는, 그리고 아무 기준 없이 이것저것에 열광하는 개인주의, 철저한 인본주의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일수록, 확실한 삶의 기준과 확실한 지도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삶의 기준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외에 우리의 삶의 기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그 외의 다른 것을 찾고, 바라보고, 그 말씀 안에서 열광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열광하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웅이시오, 열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 교황이 있으며, 성경 어디에 마리아가 살아서 하늘나라에 간 기록이 있으며, 연옥이 있으며, 면죄부가 있습니까? 그리고 성경 어디에 사람이 의인을 만들고 성자를 만듭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단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인이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지 어느 인간에도 열광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안에 바로선 성도는 교황이든, 이순신이든 어느 한 인간에게 정신없이 빠져 열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될까요? 1절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나의 모든 크고 작은 죄, 실수, 허물, 죄악들을 예수님 앞에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즉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 외에 열광했던 모든 것들, 예수님 외에 바라보았던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회개는 짐이 아닙니다. 부담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런 축복 말씀이 없습니다. 회개만이 우리의 살길이고,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한 자만이 인생의 경주를 인내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참으며 자기의 인생의 경주를 달려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말처럼 쉽게 잘됩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2절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 인생의 경주의 대상이 내 자신도 아니요, 어떤 사람도 아니요, 환경도 아니요, 세상 어느 것도 아닌,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왜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할까요? 그 다음 구절 2절에서 설명해주십니다.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참으실 때 예수님은 두 가지를 생각하셨답니다. 첫째는 십자가 뒤에 오는 부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부활을 생각하시며 그 고통과 처참과 괴로움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십자가를 통하여 온 인류가 죄를 용서받는 즐거움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저와 여러분이 구원 받는 그 모습을 보시며 즐겁고 기쁘게 여기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겪는 심한 부끄러움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창조주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그런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셨다면, 우리가 못 참을 부끄러움이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어떤 고통과 어려움과 환난, 그 어떤 부끄러움도 능히 참고 이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시험 들지 않고 승리하려면,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이제 왜 이번에 천주교 교황과 이순신 장군의 명량 영화 한편에 온 국민들이 열광하며 넋을 잃었는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기준인 성경 말씀의 부재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안 바라볼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우리 영적으로 깊은 성도들이나 이해할 말씀이지, 믿음이 없는 세상 백성들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즉 불신자들이나 교회를 다니면서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과 말은 우리와 다릅니다. 자기들이 교황이나 명량 영화 한 편에 열광하는 것은, “백성들을 생각하는 행동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우리 기독교회와 성도들은 귀를 귀울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실치 못하고, 거짓말 하고, 불법을 집단적으로 행하고, 책임지지 못하고,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위선적인 모습들에 실망하여 뻔한 인간과 영화 한 편에 미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안 지키니, 세상 법도 안 지키는 위선자들 때문에 기독교에 실망을 하고 천주교의 각본에 짜여진 시나리오에 환호하며 영화 한편에 국민들이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아니고, 관념적으로만이 아니고, 실제 삶 가운데서 말입니다. 성경 말씀을 배운 만큼, 그 말씀을 내 이웃에게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듯, 세상에서 불쌍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 잘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는 행동하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를 안아주고, 장애우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세월호 유족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보입니다. 그리고 환호합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더 안타까운 것은, 불신자들은 물론 교회 다니던 기독교인들이 천주교로 얼마나들 몰려갈지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천주교와 우리 기독교는 완전히 틀립니다. 그래서 서로 개종한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성경을 바탕한 말씀 중심이고, 천주교는 성경 위에 교황(교황청)이 있는 종교입니다. 즉 성경을 인간 마음대로 뜯어 고치고, 더하고, 빼는 종교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 시대나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면, 그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하며 사는 진짜 알곡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다니며, 온갖 거짓과 사기와 불법을 행하며 사는 가짜 쭉정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알곡 성도는 어떤 시험과 환경과 사람에도 안 넘어갑니다. 그러나 가라지 쭉정이는 교황의 바람에, 영화 한편의 바람에 날아가 버립니다. 즉 쭉정이는 사람과 환경과 분위기와 시험에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사랑이시오, 또 하나는 공의이십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요, 공의는 심판이십니다. 심판의 기준은 성경이고 십자가이십니다. 즉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바로 깨달을 수 있고, 성경 말씀의 기준으로 심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심판의 두 갈래는 천국과 지옥입니다. 성경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WCC와 천주교가 주도하는 종교 혼합주의와 다원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즉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지옥 갈 소리를 듣지도 믿지도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사탄의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4장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14장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오직 예수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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