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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번제

(열왕기상 3장 4-5절)

박충기 목사 (엘피스교회 교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이라는 해병대의 구호를 다 아실 것입니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해병대라면 아마도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해병대는 군복도 일반 군복과는 좀 다릅니다. 군복의 스타일도 그렇지만 특히 명찰이 독특합니다. 해병대의 명찰은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가 새겨지는데 빨간 바탕은 피를 상징하고 노란 글씨는 땀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 의미를 풀어보자면, 피의 죽음을 필사적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땀을 흘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땀 흘리며 노력하고 훈련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살면서, 살기 위해 혹은 이기기 위해 이렇듯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리하기 위한 노력과 훈련을 참으로 열심히 합니다. 또한 우리는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는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운동을 할 것을 권장 받습니다. 하루에 평균 2마일 정도 걷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보고하면서, 장수하는 마을의 사람들을 오랜 시간 관찰하고 연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육체의 성공과 장수를 위해 대단한 노력과 훈련들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단한 노력과 시간을 기울이고 피땀 흘리는 훈련과 열심을 낸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며, 성공과 승리를 영원히 향유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육체의 훈련이 우리의 영혼을 잘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8절에서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경건의 훈련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경건의 훈련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는 행위의 노력과 훈련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 모든 것들이 중요합니다. 또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경건의 훈련과 경건의 능력이라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지속적인 육체적 노력과 훈련에 의해 이뤄지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일천번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래 번제란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던 다섯 가지 제사 중의 하나입니다. 이는 성전에 들어서자마자 드리게 되는 제사인데, 간단히 말하면 완전히 다 태우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제물로 바친 것들이 존재의 흔적도 남지 않을 만큼 완전히 태워지고 소멸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전부로써 드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불어 제사를 드리는 이도 그 제물에 자신을 이입시켜, 그 제물처럼 자신도 하나님께 가감 없이 온전히 드려지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일천 번제라는 것이 천 회의 제사를 드림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천 번제라는 것은 천 번의 횟수만큼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천 마리의 제물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자복하고 굴복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자기가 완전히 부인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오해하여 ‘천일제단’ ‘천일 새벽기도’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경건의 모습을 드러내고 천 번이라는 숫자만큼 지속적인 노력을 하면 하나님도 감동해서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이뤄주신다는 잘못된 경건의 훈련을 강요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를 속이는 행위입니다. 순진한 교인들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기독교적이지는 않습니다.

경건의 훈련이라는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 연습으로, 확고한 결심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고, 헌금생활 충실히 하고, 성가대나 찬양팀에서 섬기고, 주방에서 봉사하는 등의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경건의 모습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또한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한결같이 영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것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깨달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다는 그 모든 깨달음과 고백을 하게 하시고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일천번제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참 소망, 참 구원을 위한 완전한 죽음, 흠 없는 자의 죽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천번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 등의 경건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반응하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과 찬양인 것입니다. 다른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으로부터 안부의 전화를 받고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이 비행기 타고, 배 타고, 자동차 타고 수천 마일을 달려 아마존 오지 중의 오지에 선교를 갔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들의 말로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주 보혈 흘렸네”라며 찬송을 부르며,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파파야, 코코넛, 유카 등을 가지고 와서 하나, 둘씩 예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를 암송하였는데 그들의 예배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풍족하고 화려한 제물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온전히 드러난다면 그것이 참 제물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고초를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것, 그것이 참 예물이며 제물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기뻐 받으시는 주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부인하고 우리의 전부를 산 제물로 드리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번제로 드려질 때 흘리신 그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 결심은 결코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을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일 천 번제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예배자, 그것이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찬양 가사처럼 천 번을 불러 봐도 내 눈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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