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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로 용서해야 합니까?

(에베소서 4:31-32)

김수명 목사 (타코마한인장로교회)

용서는 신구약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진리입니다. 구약시대에 범죄자가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 짐승의 피 흘림으로 사죄함을 받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의 죽음도 바로 용서입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용서해야 합니까?

1. 영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지옥형벌을 피할 수 없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푸심을 받아 예수님의 속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영생의 축복을 받은 것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이라는 현실의 일시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 쉽지는 않지만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용서할 줄 모른다면 그런 확고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면서 가까운 가족식구 친구 교인 간의 인간관계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친근성이 오히려 경멸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거리조종을 잘해야 하는 줄 압니다. 어떤 때는 사실 별일 아닌 사소한 것 가지고 불화하고 불편하고 등지는 일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병은 약이나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데 마음의 상처와 멍든 것은 MRI 촬영에도 안 나타나면서 큰 고통과 아픔을 주고 삶의 현장에서 우울, 열등감, 강박감, 증오, 피해의식 등등으로 자신과 남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픔을 가져오고 굴절된 삶을 살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상처를 치료하는 특효약은 용서라고 그것을 써보라고 강권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을 바라고 오늘을 살기 때문에 용서를 사용하는데 익숙해야 될 줄 믿습니다. 자기를 조금만 낮추면 용서가 보일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3,000명의 정예 군사를 동원하여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할 때 도망치고 숨어다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복수하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을 복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성한 국가를 이룩하게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안이숙 사모가 쓴 “신은 죽어요, 그런데 안 죽어요”의 책 “숯불사랑”이란 항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경자와 순애는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경자가 결혼한 후 남편이 미국회사에 취직이 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경자가 미국으로 떠난 후 혼자 남은 순애는 계모 밑에서 살기도 너무 힘들고 경자가 너무 보고 싶어 미국으로 계속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경자는 비행기 표를 사서 순애를 미국으로 초청했습니다. 불법으로 오래 있을 수가 없어 자기 부부가 이혼한 것처럼 서류를 꾸미고 순애가 자기 남편과 결혼한 것처럼 하여 영주권을 얻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순애는 그 남편과 사랑에 빠져 경자를 내쫓고 말았습니다. 여자의 일생을 통해 겪어야 했던 최대의 불행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서 받은 상처는 어찌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고통을 달랠 길 없어 방황하다 지쳐 쓰러졌던 경자를 돌봐준 미국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신앙도 갖게 되었고 나이는 좀 많지만 부유하고 마음씨 좋은 미국노인과 함께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자는 순애와 전 남편이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여 응급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예전에 자기를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던 지난날의 고통스런 기억보다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응급실로 달려갔는데, 그때 두 사람 다 의식을 잃은 채 비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의식을 차린 순애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습니다. 순애야, 내가 도와줄게 염려하지 마, 정말이야 내가 다 도와줄게. 그리고 경자는 평생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 순애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모든 수발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몇 배로 복수해도 시원치 않고 용서할 가치도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긍휼 베푸는 것이 어리석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 같으나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주님의 말씀이 사실임이 입증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3.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제한 없는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죄를 용서함 받은 우리는 적은 잘못을 용서하라는 것이 주님의 엄한 명령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형벌을 받을 죄인이 무죄선언을 받고 영생의 축복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형제와 이웃에 대하여 삼세번과 같은 어떤 제한을 두지 말고 완전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이 하신 용서교훈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주심과 같은 그런 완전한 용서를 우리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을 통하여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홍일식 박사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도둑누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재미있는 비교를 했습니다. 황희 정승이 젊은 시절 어느 시골을 지나다 주막에 들려 쉬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거위가 구슬을 집어 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후 그 집주인이 귀한 구슬을 잃어버렸다며 난리를 치더니 남루한 옷을 입은 황희 정승을 도둑으로 몰아 관가에 고발했습니다. 하룻밤 구류를 당한 후 다음 날 문초가 시작되자 황희는 “거위가 지금쯤 똥을 누었을 테니 주막에 가서 살펴보라”고 말했습니다. 관리가 달려가 보니 과연 거위의 똥 속에 구슬이 있었습니다. 관리가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묻자 황희는 “내가 그때 사실대로 말했으면 주인이 거위의 배를 갈랐을 것입니다. 내가 조금만 참으면 거위를 살릴 수 있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이 누명을 썼을 때 즐겨 쓰는 가슴이 서늘하게 하는 얘기가 있는데, 옛날 일본 시골에 떡 장수와 가난한 무사가 이웃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사의 아들이 떡집에 와서 놀고 간 뒤 떡이 한 접시 없어졌습니다. 떡 장사가 무사에게 달려와 “당신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으니 물어내라”고 했습니다. 무사는 “아무리 가난하지만 사무라이의 아들은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떡 장사가 물러가지 않고 계속 돈을 내라고 하자 무사는 “내 아들이 결백하다는 것을 보여주마”라고 말한 뒤 아들을 칼로 찔러 배를 갈랐습니다. 거기에는 떡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떡 장사의 목을 베고 자신도 자살했습니다.

이 두 일화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다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만, 오해에 대해서는 관용이 지혜로운 용서를 택하는 길인 줄 압니다. 용서는 복수도 앙심도 아닌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는 어딘가 다른 점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배지는 사랑 즉 용서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므로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가장 큰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은 용서 못하는 자신이요, 용서할 때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사람은 용서하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맘 깊이 새겨 영육 간에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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