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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와 지도자

(삼상 17:17-30 )

하경남 목사 (브라질 서울장로교회)

우리의 믿음은 무엇으로 나타날까? 태도다. 믿음이 생기면 환경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환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문제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배우고 특히 입을 조심한다. 믿음이 생긴 거다. 믿음은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능력이다.

부자는 자유롭게 산다. 여행, 쇼핑, 고급 음식... 자기가 원하는 것에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부유한 사람이 있다. 믿음의 사람이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8:13). 주님의 말씀이다. 삶이 자유롭다. 능력의 삶이 자연스럽다. 믿음의 삶이다. 오늘 성경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과 다윗을 소개한다. 엘리압은 장남이요, 다윗은 막내다. 엘리압은 키가 크고, 인물이 잘 생겼다. 당시의 기준으로 지도자 감이다. 그래서 사무엘이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려 할 정도로 사무엘의 마음까지 흔들어버린 지도자감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어린 소년이다. 중등부 또래의 아이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나이가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소년이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것은 나이의 차이도 아니요, 키의 차이도 아니요, 인물의 차이도 아니다. 태도의 차이다. 전쟁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달랐고, 골리앗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달랐다. 엘리압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요,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누구를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눈엔 골리앗은 불가능의 적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눈에는 어떤 돌을 던져도 맞힐 수 있는 덩치만 큰 밥이다. 태도의 차이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 중이다. 이새의 아들들도 전쟁에 징집되어 싸움터에 나갔다. 아버지 이새는 막내 다윗을 보내어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게 했다. 손에는 상관에게 드릴 선물과 양식을 싣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전쟁터에 왔다. 그때, 동생을 만난 엘리압은 첫 말부터 다윗을 책망한다.

1. 엘리압의 내면(28절)

1)“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먼저 오랜만에 만난 막내 동생 다윗을 본 큰 형 엘리압의 행동이 분노다. 분노할 이유도 없는데 화부터 낸다. 아무리 전쟁터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뜻밖에 동생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앞설 것이요 안부를 묻는 것이 정상이다. 어떻게 왔니? 아버지는 안녕하시니? 그런데 엘리압의 입에선 그런 정상적인 행동이 무시되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쉽게 먼저 화부터 내는 사람이 있다. 참을 줄 모르고, 기다릴 줄 모르고, 한 번의 실수를 보고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결정지어버린다. 마음이 조급하여 여유가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은 내면이 많이 부서져 있는 사람이다.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은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마귀에게 준비되어 있는 사람.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을 더 믿지 못한다. 내가 화를 내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게 그 사람의 믿음이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조급하며”(딤후3:4). 마음에 온통 세상의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기에 마음에 조금의 여유도 없는 사람.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지배자는 몰라도 지도자는 안 된다. 내면이 부서져 있다.

2)“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이 말은 다윗이 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아버지 이새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사무엘 선지지가 찾아왔을 때도 다윗은 식사자리에 끼질 못했다.

성경은 사울 왕에게 붙은 악신을 쫓아내기 위해 수금을 연주하도록 왕궁에 드나드는 다윗이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자기가 하던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인 것을 드러내기를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칠 때에....”(삼상17:15) 이렇게 설명한다.

다윗은 어린 나이지만 사울 왕의 정신과 의사다. 집에선 목동이지만 나가면 의사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왕궁을 출입하는 왕의 주치의가 되었지만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한 아들로서 충성을 다했다. 그야말로 몇 마리 되지 않는 양을 쳤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려고 하는 다윗이다. 그러나 엘리압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하는 전쟁만 크게 보였지, 몇 마리의양을 치는 그런 일은 안중에 없던 사람이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희생이 따르고 중요해도 관심이 없고 무시하면서 내가 하는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부서져 있는 사람이다.

3)“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안다” 이 말은 지독하게 다윗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말이다. 다윗이 왕궁을 출입할 때 왕궁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삼상16:18).

어째서 다른 사람은 여호와와 함께 하는 다윗이라고 하는데 형은 다윗이 교만하다고 하는가? 그것은 성령의 삶을 살고 있는 다윗에 대한 질투와 시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일부러 다윗을 무시함으로 자기의 마음의 위로를 삼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너는 교만과 악이 가득한 나쁜 놈이야. 네가 어려서부터 그러더니 역시 너는 별 수 없어.” 이렇게 함으로 성령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기를 스스로 위로하려고 한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서 버렸다? 구원에서 쫓겨났다는 말이 아니다.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내면이 부서져 있던 엘리압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2. 다윗의 내면(삼상16:13)

다윗은 성령의 사람, 학교 다니기 전에 성령충만부터 받은 사람, 친구를 사귀기 전에 성령 충만 부터 받은 소년이다. 성령충만은 능력충만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다윗은 형의 비난에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주저앉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얘기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러십니까?” 이게 성령의 능력이다. 사람의 힘으론 불가능이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포기하려고 할 때가 언제인가? 모함 받을 때다. 무시당할 때다.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모함할 때. 쉽게 포기한다. 내 돈 들여가면서, 무엇하러 욕을 먹느냐? 하면서 포기한다. 그런데 어린 다윗은 놀랍게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올 게 온 것처럼 당당하다. 성령의 능력이다. ‘소유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라고 한다. 믿음은 우리의 태도를 바꾼다. 믿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골리앗이 밥으로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다윗을 귀하게 사용하시겠단다. 이런 다윗을 백성의 지도자로 쓰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귀하게 쓰시는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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