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장로교회)
성경의 시간을 가리키는 표현은 우리에게 해석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합니다. “이때로부터(Ἀπὸ τότε)"(21절)라는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16절) 이후부터를 말합니다. 그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능력이 있고 기적을 행하시는 신적(神的)이고 왕적인 모습으로 비쳐졌지만 베드로의 고백 후에는 좀 더 그리스도의 깊은 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 이전에는 나병을 고치시고(8:1-4),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8:5-13),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8:23-27),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8:28-34), 중풍 병을 고치시고(9:1-8), 한 관리의 딸을 살리시는(9:18-25) 등 각종 병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14:13-21),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14:22-33) 등의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는 능력의 그리스도가 기록되어있지만, "이때로부터"라는 본문 말씀부터 주님의 낮아짐을 보게 됩니다. 이때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화려한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당하며 소외된 계층이었던 제자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먹여 주고 병을 고쳐 주고 악한 영을 쫓아내며 사회적, 정치적 압박에서 해방시켜 줄 ‘수퍼 히어로‘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제자들은 자신들의 앞날에 평안과 영광이 눈앞에 환하게 동터온다고 생각하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본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했던 초인적 지도자에 대한 대망으로 만족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의 흐름에서 보면 베드로의 고백은 정확했지만 아직 삶 속에서 더 연단되고 제련(製鍊)되어야 할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광 전에 자신이 먼저 받아야 할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해의 한계에 부딪혀서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책망하듯이 말했던 것입니다.
영광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던 베드로에게 혼란이 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 크게 궤도를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베드로 같이 역사를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직결시키고자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보의 죽음은 '그리 마옵시고' 죽음 없이, 십자가 없이 역사적 상황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자고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음 없이 직접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길이든지 아니면 자신이 죽고 살아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길 중 하나를 택하셔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천국은 혁명을 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역사와 연속성을 가진 동질의 나라입니다. 즉 병들고 헐어져서 낡고 부조리와 고통이 있어서 끝없이 개혁해도 해 아래서 새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개혁자나 혁명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서 건설하는 나라는 죽기 전의 역사적 현실과는 경험이나 인식을 완전히 벗어난 초절적(超絶的) 나라로서 이전과 연속이 없습니다. 전혀 새로운 나라입니다. 부패와 죽음과 고통이 없어서 다시는 개혁이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개혁자나 혁명가가 아니라 창조자이십니다. 왜냐하면 해 아래서는 전혀 없던 것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갈래 길에서 베드로도 선택해야 합니다. 복된 주님의 제자가 되든지 아니면 새 나라 창조를 가로막는 사탄이 되든지 말입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주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라고 하자 황급히 나서서 "그리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인간적인 애정과 의리가 급하게 발동이 걸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는 일이며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십자가를 통과한 영적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를 가로막는 육신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인간적 의리나 애정은 때로 하나님 나라의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는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정은 곧 인정(人情)입니다. 인정이나 동정(同情), 혹은 정리(情理)나 의리 등은 인간사에는 더 없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의 실재에서는 아닙니다. 요단 강 이쪽 편에 있는 것으로서는 인정이나 동정도 욕심이나 욕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전인적(全人的) 부정이며, 옛 세상에 대한 전체적인 거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서 선은 없으며, 상대적인 선은 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여 그 죽음을 만류했지만 영적 빛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베드로의 그런 사랑의 행위를 사탄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동정도 사탄의 일인 것을 깨닫기 까지는 결코 주님을 바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돕고자 행한 일도 결국은 사탄의 일이 되었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했고, 실상 베드로가 주님의 죽음을 만류한 것은 사사로움이나 이기심 없이 순수한 동기에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불순한 동기라고는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이것은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는 자기 부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은 옛 세상의 일로서 사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가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나 사람이 십자가에서 부정된 후에 나온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에서 부정되지 아니한 자연인 그대로냐 하는 것이 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십자가 없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최고의 선행도 십자가에서 부정된 최악의 일보다 하나님의 앞에서는 가치가 없습니다.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일도 사탄의 일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 예수님과 동일한 길을 걷고자 한다면 일단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 사는 종교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고 세상에 속한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결국 그것은 생명을 잃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8절)는 말씀은 좀 난해한 말씀이지만 다음의 몇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에 대한 해석인데,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40일간 십여 차례 보이셨습니다. 부활은 최대의 권세이고 진정한 왕은 죽음을 이겨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곧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이며, 그것을 목격한 제자들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함께 갔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실 주님의 예언을 듣게 된 제자들입니다. 즉 그 제자들은 주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신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부활은 왕권의 확증입니다. 죽음 아래 있는 자는 누구든지 진정한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사망의 종으로서는 왕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말씀 그대로 죽기 전에 주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둘째 해석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은 주님이 왕권으로 오시는 것을 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적인 권세입니다.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성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은 누구나 예수를 주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28절)라는 범위에 해당되었던 제자들이, 오순절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정한 왕권을 경험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왕권을 기대했던 제자들은 아직은 그리스도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조만간 너희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인자가 진정한 왕권을 가지고 너희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사실상 이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대부분이 오순절을 경험했고, 그때부터 유한한 세속적 왕권이 아니라 무한하신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식하고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성경은 계시의 책입니다. 계시는 역사와는 다릅니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는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입니다. 주님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실상은 계시의 영원한 현재(eternal-now)로서, 이 시간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종말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 오실 때가지 읽혀질 것이며, 반드시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는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주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이 이 세대에 이루어져서 나의 말씀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 오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나의 말씀이 되도록 기도하라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종말론적인 확신으로 성경 말씀을 순종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때로부터 능력과 영광으로 오신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까지 낮아지신 것과 같이 우리도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평생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죽기 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경 말씀을 붙잡고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뵙고 가장 먼저 그분 앞에 나아가 엎드려 경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schang@bostonkorea.org
02.1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