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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의 공동체, 기적의 공동체

요한일서 4:1-6
홍승민 목사

(브니엘한인장로교회)

전 세계에 극소수만 그 자격을 가지고 있는 큐그레이더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큐그레이더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커피 감별사입니다. 와인 맛을 감별하는 사람을 소믈리에라고 한다면 커피 감별사는 큐그레이더라고 부르는 것이죠. 본래 큐그레이더는 커피 가운데서도 아라비카라고 하는 커피의 생두를 감별하는 사람이지만 대개 모든 커피 맛을 감별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렇게 감별해서 커피마다 등급을 매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도 커피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 향과 맛을 잘 구별하실 수 있으실 텐데요, 커피 가운데는 단 맛 나는 커피, 신 맛 나는 커피, 심지어 짭짤한 맛까지 나는 것도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 고유의 믹스 커피는 달달한 맛이 나는 것이 참 좋죠. 하지만 커피 각각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맛을 감별해 내는 것은 정밀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큐그레이더는 무려 22개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격증 취득 이후에도 3년마다 재시험을 봐야 한다고 하니 참 어려운 직업이긴 합니다. 커피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정밀하게 감별하는 것은 참 어렵기도 하지만 중요한 일이죠. 

오늘 본문에서도 감별하는 일이 나옵니다. 바로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는 요한의 당부가 그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분별은 소믈리에의 와인 감별이나, 큐그레이더의 커피 향이나 맛의 감별보다 훨씬 중요한 감별 혹은 분별일 것입니다. 1절에서 영을 분별하다라고 할 때 사용된 원어는 “무엇인가를 비평적으로 조사하거나 시험하고 살피면서 그 진위를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살펴보고 조사해서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들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이 세상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나왔고 교회 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해 나가던 1세기 당시에는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흔들려는 이단들이 많이 있었고 영지주의의 싹이 되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요한의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들을 경계하면서 영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2절과 3절입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은 독자들에게 영을 분별하는 시금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을 인정하는 것, 즉 예수님의 신성뿐 아니라 인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단들을 감별해 내는 중요한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당시의 이단들은 많은 경우에 기독론 즉 예수님에 관한 교리들과 구원론에 큰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요한의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는 이러한 이단을 확실하게 반대하였고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 공동체에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실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분리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반짝인다고 모든 것이 다 금은 아니다”라는 미국의 격언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으로부터 얻게 되는 교훈은 건전한 신학과 교리의 중요성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학 혹은 교리라고 하면 왠지 무겁고 딱딱하고 드라이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혹은 “꿩 잡는게 매다”라는 식으로 성도들이 은혜받는다면 다 된다고 생각해서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받았다고 할 때는 이렇게 바른 신학적 기반이나 건전한 교리의 토대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큰 구원의 일을 감사하고 음미하며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나 감정이 만족하게 되는 경우를 말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교단도 상관없고, 신학도 상관없고 부흥이나 성장이 된다면 다 사용한 결과가 교회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성도들의 삶이 교회 안과 세상에서의 삶이 분리된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른 신학의 기초가 없을 때 신앙은 주관적으로 되고 맙니다. 게다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주의가 휩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바른 것”, “진리” 혹은 “옳음”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때문에 더 믿기가 힘들어집니다. 차라리 초대교회처럼 뚜렷한 이단들이 있다면 대적하기가 좀 더 확실하고 수월할 수 있을 텐데 교묘한 혼합주의는 더욱 현대 교회의 성도들의 시야를 흐리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더욱 든든하게 건전하고 건강한 신학의 뿌리를 내리고 자라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모든 교리와 신학의 기초와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그 분이야말로 모든 성경의 중심이며 해석의 중심입니다.(눅 24:27, 44) 모든 교회는 바로 예수라는 기초 위에 그 터를 두고 있음을 기억하고 그 분을 중심으로 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건전하고 건강한 신학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공동체가 바로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희들에게 전해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이제 요한은 두 번째로 4절부터 6절에서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이며 그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신 분이심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기 때문에 즉 그 분의 성육신을 인정하고 신성과 인성을 완벽하게 가지신 분이심을 고백하며 주로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분리주의자들이나 거짓 이단들처럼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전도하려고 교회의 대각성 전도집회에 데려간 한 후배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울었지만, 마지막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 14-15절에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지만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공유하고 모인 공동체는 기적의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무슨 놀라운 은사나 이적을 경험한 자들이라기보다 바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받으신 자들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백을 하는 공동체는 기적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요한이 공동체에 전하는 두 가지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건전한 신학의 필요성입니다. 그런 신학으로 잘 무장되고 준비된 공동체 즉 분별의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학이란 결코 드라이하거나 지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는 탐구입니다. 열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매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렇게 건강하고 든든한 신학의 토대 위에 설 수 있기를 기도하고 노력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의 공동체가 기적의 공동체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적입니다. 성령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택함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 기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 자체가 기적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축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기적의 공동체의 일원임을 감사하고 또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모든 것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이미 이기게 하셨기 때문에 거짓에 속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분별과 기적의 공동체임을 깊이 감사하고 또 그런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penielkpcpastor@gmail.com

01.2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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