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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山上)과 산하(山下)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놓는 성도

누가복음 9: 28-43
양수철 목사

(에버그린 선교교회)

르네상스 시대에 3대 거장이 있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이지요. 그 중에 라파엘로가 유작(遺作)으로 남긴 작품이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The Transfiguration, 1520년]이라는 그림인데,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한 성화지요. 그런데, 그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이 그림을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교황이 보고 울 만큼 잘 그린 명작(名作)인데, 변화산 위의 세계와 변화산 아래의 세상을 극명하게 대조시킨 그림입니다. 

그래서, 상단 부분을 보면 그리스도가 하늘로 치솟아오르며, 모세와 엘리야는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찬란한 세계가 그려져 있고, 그 바로 밑에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며 황홀경에 취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단 부분에는 귀신들려 거품을 물고 있는 아이와 안타까워하는 아버지, 그리고 제자들을 야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교황이 울 정도로 잘 그린 명작이지만 이 그림에 빠진 것이 하나 있는데, 별천지와 생지옥을 연결하는 고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산 위의 모습은 빛으로 찬란한데, 산 아래 모습은 흑암으로 가득합니다. 완전한 2분법이지요. 이슬람교의 교리와 비슷합니다. 이슬람교의 신(알라)은 이 세상을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 놓고, 머나 먼 곳에 초월해 있으면서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 신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신은 그렇지가 않지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것만이 아니라 운행도 하십니다. 또 관리 보수 심판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일에 세심하게 관여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동참하십니다. 

여기저기에 벧엘교회도 있고, 벧엘수양관도 있는데, 왜냐하면,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좋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원래 하나님의 집은 어디에 있어야 하나요? 당연히, 하나님이 계신 천상입니다. 그런데, 정작 벧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야곱이 형의 미움을 사서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광야에서 노숙하게 된 바로 그곳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환상 중에 보니까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창 28:1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나요? 하늘과 땅은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연결시키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려면 ‘사닥다리, 즉 구원의 십자가’는 필수적인 조건인데,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고, 인간은 이 다리를 통해서 하나님 품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레서, 마태복음 27장 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휘장은 언약궤가 들어있던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이었는데,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의 의미는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분명하게 기록하셨는데,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 즉,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라고 분명히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거룩한 몸을 찢으신 까닭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사망의 담을 허무시고 새롭게 여신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 1-7절을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을 사람으로써 이 땅에 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라.”(골 3:1-3)고 하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늘만 바라봐서는 안 되고, 땅도 함께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불교처럼 산 위에 올라가서 그 곳에 칩거하면서 세상을 등지는 은둔종교도 아니고, 도교와 같이 무릉도원에서 신선 노름하는 종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27:27)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는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을 함께 주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에만 매달리는 신앙은 자칫 맹신이 될 수 있습니다. 맹신(盲信)은 병든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위는 바라보지 않고 오직 아래의 땅만 바라보면 그건 불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위아래가 연결되는 신앙입니다.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저 낮은 곳에도 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위아래가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고 분리될 때에는 언제나 위의 세상은 황홀한 별천지가 되지만 아래 세상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아수라장이 됩니다. 

확실한 예를 들면,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 위로 올라갔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산 위에는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연기’로 가득했습니다(출 19:18). 즉,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산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아수라(阿修羅)장이었지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드리며, 먹고 마시며, 떠들며 광란을 부렸습니다(출 32: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산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죄란? 방치해두면 다 오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산 꼭대기에만 머물면 안됩니다. 반드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산 위에서 멋진 것을 구경하면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가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돕는 일입니다.  

그래서, 31절을 보면,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別世)하실 것을 말씀할새”라고 했는데, 한글로 별세한다는 말은 ‘세상과 이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별세라고 하면‘죽는 것’을 연상하지요. 그러나, 별세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별세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엑소도스]입니다. [엑소도스]는 출애굽기를 말하는데, 그러면 출애굽하는 것이 죽으러 가는 것이던가요? 아니지요? 구원해 내서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떠나시므로, 인간들을 더 좋은 천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별세해야 합니다. 그 말은 ‘죽자!’는 말이 아니라 ‘아수라장인 산 밑으로 내려가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고 더 좋은 낙원으로 인도해 들이자!’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행20:24) 그러므로, 지금도 종말론자들처럼 하늘만 바라보고 살든지, 아니면 무신론자들처럼 이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른 그 잘못된 자리에서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종국에는 찬란한 영광이 가득한 천국에 다같이 들어갈 수 있도록 힘쓰는 우리가 다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나에게서 넘쳐 흐르고, 그 넘치는 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들(유대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나만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멕시코 장벽처럼 세상을 향해 높은 담을 쌓았습니다. 그 결과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간 것이지요. 그래서, 세익스피어와 동시대에 활동하며 영국인들에게 많은 감명을 준 죠지 허버트(George Herbert) 목사님은, “오직, 인간만이 한 손으로 천국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땅을 붙든다. 그리고, 두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고 했지요? 그러나, 인간은 아직도 무신론자도 있으므로, 성도라도 바꿔야 하리라 믿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왕과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벧전 2:9). 그런데, 제사장을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데, pons(다리)와 facio(만들다)의 합성명사입니다. 즉, 다리를 만들어 놓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광스러운 이 직분을 잘 감당하려면 반드시 예수님처럼(히 4:14) 천상과 지상에 다리를 만들어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그저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죄지은 사람, 삶의 목적은 잃어버린 사람, 귀신에게 고난 당하는 사람 등등을 모두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광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게 되는 것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16,23)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강시원 씨]가 쓴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이란 시를 소개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은? 베품을 미덕으로 여기며, 순간의 손해가 올지라도 감수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마음이 넉넉한 사람은? 욕심을 부릴 줄 모르고, 비움이 곧 차오름이란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덕을 베풀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을 욕심없이 바라보는 마음의 눈과 맑은 샘물처럼 깨끗하고, 아랫목처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excelbright@gmail.com

12.0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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