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 선교회)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많은 분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옛날 아브람, 모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던 것 같이 나에게도 그렇게 해 주시면 내가 순종할 텐데’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그 뜻을 알려주고 또 세밀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가 기도할 때 귓속말로 알려줍니까? 우리가 꿈을 꿀 때 환상으로 알려주거나 혹은 말씀 묵상할 때 큰 글자로 확대해 보여줍니까? 사실은 그런 구체적인 방법으로 개인에게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신 것은 개인적인 삶의 부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큰 의미에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즉,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한 개인, 한 집단과 국가적으로 나타났으며 때가 차매, 모든 열방과 민족에게 향하신 뜻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비결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순간순간마다 알려주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업하는 사림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잘 팔리는 품목을 족집게처럼 알려 달라고 하면 알려주십니까? 개발자가 어떤 아이디어가 좋은지 기도할 때 로또 맞듯이 눈앞에 펼쳐 보여 주실까요? 공부하는 학생은 어떤 전공이 앞으로 잘 나갈지 아니면 어떤 논문을 써야 대박 날지 기도하면 알려주실까요? 직장을 구하는 사람이 구글 회사가 더 전망이 좋을지 아마존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 하나님께 알려 달라면 알려주실까요? 그런 것은 점집에 있는 점쟁이에게 가야 더 어울립니다. ‘너 누구와 결혼해라, 너 무엇에 투자하라’라고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내 고집 속에 하나님의 뜻을 채워놓고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은 데 있습니다. 작정기도 한다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만 계속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결론을 내리고 만일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면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왜 나를 미워하시냐고 합니다. 그런 기도의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도우미 역할밖에는 더 이상 아닙니다. 내 삶의 주인은 여전히 내가 되기 때문에 내 뜻을 고집스럽게 우격다짐으로 이뤄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곡이 진심이라면 우리는 그런 떼를 쓰는 기도는 그쳐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라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순종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그 뜻을 계속 알려주고 계십니다. 구약의 인물들에게는 직접 나타났지만 지금은 우리에겐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그냥 일반 책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는 살아 역사하시는 책이라서 The Living Bible 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살아서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감동도 오고 책망도 받고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움직이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 때와 같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이미 그 법을 써 주셨습니다. 렘 31: 33에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여호와의 말씀 이니라” 새언약에 관한 약속은 성령께서 오심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인도하시고 주장하시면서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인격체가 되십니다. 그래서 강제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지는 않습니다. 인격체인 우리와 인격체인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교제, 그것도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우리를 다듬어 가시고 우리 인격을 선한 모습으로 형성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장악하고 꼭두각시처럼 마음대로 움직이며 원하는 대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일을 진행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도가 큰 죄를 지으면 성령님은 무척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불편하여 탄식하시고 우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 환희로 반응하시고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행복이 가득하게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힘을 공급하시고 환경이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고난을 뛰어넘게 하시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 인격이 성숙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26년간 선교사역을 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무슬림 사역을 하면서 가장 황당했던 말이 “인샤 알라” 입니다. 알라의 뜻 이라는 말이죠. 그들은 좋은 일이 있어도 인샤 알라, 나쁜 일이 있어도 인샤 알라. 차사고가 나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쳐도 다 인샤 알라 하면서 이겨냅니다. 가난해도 어려워도 인샤 알라로 덮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그 환경을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상황을 바꾸려 하면 알라의 뜻을 어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엔 굉장한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운명론으로 가장한 허무주의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변명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생각을 바꿔주는 방식으로 그 부분을 질문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리는 복음 전파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이 있다고 해도 때론 상황이 호의적이지 않게 되면, 갈등이 생기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 부추기는 말 때문에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분명한 확신을 가졌더라도 눈앞에 장애물이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낙심하고 주저앉고 때론 포기하게 됩니다. 평소에 말씀과 기도로 무장된 사람만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에 관한 결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견뎌내도록 하는 원동력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 때문입니다. 그분의 전능하심을 의뢰할 때 비록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이겨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과정을 걸으면서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란 Para Cleitos 라는 의미로 옆에서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기다리는것 잘하는 사람 흔치 않습니다. 특히 언제 이뤄질지 정확한 시간을 모르면서 기다리라면 다들 힘들어합니다. 삶에서 힘들 때 빨리 건져주시지 않을 때 당황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바른 기다림은 우리게 유익을 줍니다. 때론 일이 지나고 볼때 오히려 기다려서 더 감사한 적 많습니다. 기다림은 인내를 배우게 하고 영적 근육을 키우고 꿈을 준비시켜 주십니다. 조급한 마음에서 실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무엇을 합니까? 그냥 시간 흘려보내며 무의미하게 보냅니까? 때론 불평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면서 왜 기다려야 하는지, 그 기다림 속에 어떤 유익을 줄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세계성을 일깨워 줍니다. 복음은 결코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기록은 기독교가 예루살렘서 로마로 후에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기까지 숱하게 이방종교에 부딪치고 이방철학에 부딪치고 이방문화에 부딪치면서 그럴 때마다 어떻게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변증해나갔느냐 그 귀중한 비결과 그 생명적 역사를 증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음이 전파될 때에 같은 핍박이 있었던 것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넘어섰는가는 사도행전에 해답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전파에 귀중한 지침서가 되기에 저는 이 책을 좋아합니다
사도행전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오순절의 주제니까 어떻게 역사하고 어떻게 이끌어가느냐는 이야기로 풀어갑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믿게 하는 데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아는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고 지식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능력입니다. 성령없는 기독교리는 추상적인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복음 전파의 사건에는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진행되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에 대한 얘기입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죄를 이기는 능력이요. 핍박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곧 능력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를 고용하고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성령 받아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고용하시고 우리로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켜 그 변화된 삶으로 복음이 퍼져가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시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슬림 지역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딱 한 마디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과연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얼마 후에 그곳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예배가 없던 곳에 예배가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집니다. 바로 성령께서 친히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문화까지 다 고용하셔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친히 진두지휘하신단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 합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서 내가 큰 일을 진행하는 줄 압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줄 착각합니다. 성령 받으면 내가 더 힘이 생기고 더 능력있게 일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나를 주관하셔서 그 뜻일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개인적인 일을 이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의 역사에 내가 포함될 때 큰 뜻이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하고 부탁하셨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기 전에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말라, 어떤 일도 진행하지 말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기도하며 이끌어 가시도록 여유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때가 되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준비할 때 그 일이 진행될 줄 믿습니다. 그런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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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2.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