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장로교회)
“호텔 스위트룸을 얻은 한 남자가 가방을 풀고 있는데 호텔 매니저가 찾아와 인사를 건넨다. 우리 호텔의 최고 자랑인 이 방을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머물다 가시길 바랍니다.”라고, 인사를 하자 짐을 풀던 남자는 다시 가방을 싸더니 나가겠노라고 나선다. 매니저가 "뭐가 문제가 있으십니까 손님"하고 묻자 남자 왈 "내가 집이 싫어서 비싼 돈 써가며 여길 왔는데 집에 온 듯 쉬라고? 난 그리 못해”라고 대답하고 나갔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고, 집에 머물 기를 원하지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직장에서 집에 가는 것이 기쁘고 즐거워야 하는데 가기 싫어한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집에 가기 싫어하고, 일을 끝낸 부모님들도 집에 가기 싫다고 한다. 여러분 중에는 집에 가기 싫은 사람이 없는가? 혹시 집에 가는 것을 지옥에 가듯, 도살장 가듯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더 이상 집이 행복의 장소, 행복을 만드는 곳이 못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행복한 가정이 되는 그 출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 모든 남편들이 좋아하는 성구를 묻는다면 1순위 말씀이 본문일 것이다. 오늘 성경 말씀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한다. 먼저 부부간에 관계와 부모자녀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런데 말씀의 형식이 부탁이나 권면의 모양이 아니다. 명령하듯 말씀하신다. 우리가 집에 와도 가정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아주 단순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 불편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마라. 부부가 할 일과 부모자식 간에 지켜야 할 일을 말씀한다. 매우 어려운 일 같이 보인다. 그러나 어렵지 않다.
행복의 출처
무엇이 행복의 출처가 될 수가 있는가? 사람들은 외부적인 요소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착각한다. 집이 좀 크면, 원하는 차를 타면, 남편이 잘 벌어오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면 등등 착각이다. 도움은 될지 모르나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갖고 부유한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조사결과들이 많은가? 행복의 출처는 외적 요소보다 내부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부부사이의 돈독한 관계가 외부적인 조건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 박스를 접으며 행복하게 살던 부부가 복권에 당첨되어 환경은 더 좋아졌는데 이혼하고 가정이 파탄 났다.’는 기사도 있었다. 서로 의지하고 친밀했던 관계가 깨져버렸다. 나는 오늘 신학적 의미보다 현실적 차원에서 말씀을 적용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조건을 찾아보려고 한다.
주 안에서 마땅하다
에베소서에만 30번 이상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in Christ-주 안에서”라는 말이다. ‘주 안에 있다’라는 조건 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감사도 주안에서 해야 한다. 주안에서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남편도 아내도 우리 가정도 주 안에서 형성된 것임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 그저 둘이 좋아하고 사랑해서 가정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사는 것, 누리며 사는 것이 내 능력이나 부모 잘 만나서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틀린 것이 아니지만 그 모든 조건과 환경이 주께서 조성해 주신 은혜라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안에서 사는 사람의 자세다. 살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그럼 ‘이런 사람, 이런 아내, 이런 자식이 어찌 내게 왔는가?’ 원망한다. 그러면 감사가 나올 수 없다. 용납이 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난 고국에서 사역할 때 장애아를 둔 부모님들을 자주 만났다. 그분들이 때로는 얼굴이 더 밝고, 행복감을 느끼고, 감사가 넘치는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저래서 어찌 사는가, 걱정을 해주지만 정작 본인들은 감사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런 자녀도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시고, 맡겨 주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좋은 것, 좋은 상황만 아니라 좋지 않고, 내가 만족할 수 없는 상황도 주님이 주셨다고 인정해야 한다. 여기 있는 제 이야기를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제 얼굴을 보고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으로 본다. 목사님이 무슨 걱정이 있겠어, 아이들도 반듯하고 사모님도 참 좋고, 그런 가요? 그러니 어디 가서 내가 힘들다 말을 못한다. 그런데 저도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다. 남들 다하는 자식 걱정 없겠는가?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걱정 없는 인간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내 삶에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주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존중하는 것
이제 이렇게 모든 것이 주안에서 있음을 인정할 때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갖을 수 있게 된다. 미운 마음이 들면, 내 아내기 때문에 사랑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가 힘들다.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데 내 남편이기 때문에 감싸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 목사를 인정하지 못하는데 그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마음에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원망과 반목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이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들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해도 그게 되는가? 안 된다. 그게 되면 결혼한 지 며칠 안 되서 이혼하고, 30년을 살고도 파탄지경에 이르겠는가? 존중함이 없기 때문이다. 존중은 우월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잘나서 하는 것이 아니다. 위계질서로 예우차원에 하는 것도 아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중할 때, 남편이 아내를 존중할 때 사랑으로 대할 수 있게 된다. 부족하다고 탓하기 전에 내가 채워줘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서로 미안해하게 된다. 그러니 작은 것에 서로 감사할 수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행복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존중하는 마음이 커 가면 강압적인 태도가 바뀌게 된다. ‘당연히’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부모니까 당연히 해줘야지. 가장이니까 당연히 벌어와야지, 아내니까 당연히 챙겨줘야지 라는 위험한 생각은 안 하게 된다. 의무감이 되 버리고, 그 때문에 행복해야 할 관계가 족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아내, 자녀이기 때문에 뭔가 조건을 위해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기에 친절해지는 것이다. 존중하니까 사랑의 헌신이 자연히 나오는 것이다. 꼭 신랑이신 우리 주님이 신부인 나를 사랑하시고 존중하시니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져주실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의 헌신
이 가정, 이 자녀, 이 사람을 내게 보내주시고, 맡겨주신 분이 주님이시다고 인정하니 존중하게 되고, 이런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위해 사랑의 헌신을 하게 된다. 여기에 조건이 붙지 않는다. 종종 우리는 무엇, 무엇 때문에 내가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너희들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견디며 살고, 나중에 집장만을 위해 참고 고생하는 것이고, 어느 자리에 오르기 위해 다 희생하고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살면 나중에 다 후회한다. 왜?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망감을 누리기 때문이다. 아이들만 믿었는데 실망하는 일이 생기고 집장만을 했는데 살아보니 불편하고, 올라가보니 보는 눈이 너무 많아지더라는 것이다. 그걸 느끼니 행복하지 않게 되더란다. 인간적인 헌신은 보상을 누리길 원한다 외형적이든 내형적이든 말이다. 그런데 이런 헌신은 약간의 만족감은 줄 수 있지만 지속 유지가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살만큼 살았다고 하면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허무함을 말하는 이유가 뭔가? 그것은 진정한 행복의 조건을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행복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 ‘주안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즘 서로 한눈에 보고 반해 결혼하는 사이도 둘 중 하나는 이혼한다는 말이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가 행복한 가정이 되지 못하는 것이 누구 때문이고, 어떤 조건 때문이라고 말하기 전에 오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 관계가 우리 가정이 ‘주안에’ 있는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안에 주어진 것인지 말이다.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기에 서로 모자라도 존중하고, 그 안에 사랑하는 자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아낌없이 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은 헌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도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행복한 가정과 관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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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