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교회)
요나가 니느웨 성읍에서 나가 성읍 동쪽에 앉아 초막을 짓고 앞으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아니, 그렇게 엄청난 선교 사역을 이루었으면 빨리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 갈 일이지 왜 그곳에 초막까지 치고 성읍을 바라보고 있을까?
도무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니느웨로 가서 회개할 것을 외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다시스로 도망을 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니느웨 백성들도 그랬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벌을 받아 멸망을 당해 버려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악독했는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도 멸망시키는 것을 말씀하셨을 정도로 악독하였다(요나 1:2). 이럴 정도로 타락하거나 악독한 도시가 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나온다. 그들은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당해 버렸다. 그런데 니느웨는 심판은 커녕 요나가 간 이후 변화되어 치안과 공의와 정의에 있어 최고의 도시로 변화되어 버렸다.
니느웨는 지극히 큰 도시이자 가장 강력한 국가 앗수르의 수도였다. 사흘을 걸어야 가로지를 정도의 도시였으니 직경이 약 100Km 정도의 거대한 도시였다. 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는데 외치기 시작한지 하루 만에 그만둬 버렸다. 더 이상 외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치자마자 바람에 불이 붙어 번지듯이 자기들이 서로 알려서 도시 전체가 회개해서 난리가 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한 일은 유래가 없었다. 아니, 임금까지 아예 조서를 내려 사람과 짐승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짐승까지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울부짖게 하는 이상한 역사가 일어나 버렸기 때문이다. 기한이 있는 금식이었을까? 아니다. 무기한 금식이었다.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는 금식이었을까? 아니었다. 그렇게 회개하면 혹시나 하나님의 마음이 변해 살려 주실는지 목숨을 건 요행을 바란 금식이었다. 요나는 이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회개를 하니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 주셨지만 니느웨 사람들이 진정 회개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설사 진정 회개했다 하더라도 ‘제 버릇 개 못준다.’는 말이 있다. 금방 다시 옛날 습성이 나타나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지켜보겠다고 그곳에 초막을 짓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복음을 받고 회개한 그들에게 심판의 손길을 기다리며 니느웨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이 기가 막힌 요나의 태도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을 품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정작 심판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요나가 아닌가? 정말 변화되지 않아 심판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좌우를 분변 못하는 자’로 칭하셨다. 불순종하더라도 몰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선지자가 아닌가?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선택된 자다.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 말씀을 몸으로 살며 선포하며 전하고 가르쳐야 하는 사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평소에 하나님과 대화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니느웨에 심판을 선포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한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럴까? 살과 뼈까지 불에 타고 녹아지는 지옥의 고통같은 뱃속의 고통을 삼 일간 겪게 되자 그때는 자아가 다 무너졌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요나 2:8, 9).” 극심한 고통에 영혼이 가물가물하도록 주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모든 붙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아가 녹아지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마음을 지배하는 마음자리에는 요나의 저런(요나 2:8,9)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은혜로 충만한 마음 자리였다. 그럴 때 지옥의 뱃속 같은 곳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작심삼일이라든가? 원수 같은 니느웨 사람들을 바라보고 살면서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아 이 마음이 다 증발되어 버렸다. ‘제 버릇 개 못준다’ 더니 금방 토한 것을 다시 주워 삼킨 모습을 보게 된다. 남의 모습은 잘 바라보지만 나의 모습은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다. 요나의 잘 변화되지 않는 저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이 요나를 바라보는 하나님은 요나의 고백대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요나 4:2)”이시다.
가서 말씀 전하라는 니느웨가 아니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이키시기 위해서였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 선원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절망적인 풍랑을 일으키신 것도 요나를 기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선장을 보내 배 밑에서 잠을 자는 요나에게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기도하게 깨우셨다. 그래도 안 되니까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제비뽑기를 하게 만들고 요나가 뽑히게 해서 회개하게 만드셨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니 사람들을 보내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즉 ‘회개하라 네 죄를 고백하라’고 윽박지르게 하셨다. “네 생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신 것은 ‘네가 선지자가 아니냐?’는 하나님의 깨우치심이었다. 회개는커녕 차라리 나를 풍랑 속에 던져 죽여 달라는 요나의 요청에 어지간한 분 같으면 관계가 여기서 끝이 났을 것이다. 이런 강퍅한 종은 어느 주인이라도 버려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속에 요나가 빠져 바다 바닥에 높은 수압에 눌려 있음에도 죽지 않게 하셨다. 그를 삼키고 니느웨로 항해할 큰 물고기까지 예비하셔 회개하자 니느웨 뭍에 토해 내게 하셨다. 요나를 위한 완벽한 은혜의 장소가 어디인지를 잘 알고 준비해 두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회개하자 분해 죽을 것 같은 요나, 기도하여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 이다.” 이런 요나에게 당연히 진노하셔야 할 하나님이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실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건 절대 주종 관계의 대화가 아니다. 철없는 자식에게 타이르시는 태도와 대화다.
니느웨 성 밖에 성읍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이 있었을 것이다. 죽여 달라더니 이제는 아예 초막을 짓고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니느웨 성읍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이런 기가 막힌 요나의 태도를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자라게 해 그늘이 지게 하여 머리에 쬐는 땡볕을 가리게 해 주셨다. 또한 박넝쿨과 함께 줄기를 갉아 먹을 벌레, 뜨거운 동풍, 구름 한점 없는 뜨거운 해를 세트로 준비하셔서 요나를 가르치셨다.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 4:10-11)”
요나서를 대하면서 우리가 가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다.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처럼 진멸될 위기에 처했을 정도로 악독함이 하늘에 상달되게 죄악 속에 살던 사람들이 니느웨 사람들이 아닌가? 요나의 선포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소문을 듣자 자기들이 알아서 목숨을 걸고 회개를 해 온 도시가 하나님께 돌이켜 버린 엄청난 역사… 이것은 역대 선교사에서도 정말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둘째는, 그렇게 강퍅한 요나를 왜 하나님은 끝까지 붙들고 사용하시고자 하실까? 그런 일꾼은 마땅히 버려야 마땅하심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강퍅한 요나를 붙들고 끝까지 인내하며 같이 일하고자 하셨을까? 선지자가 없어서가 아니였을 터인데…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신가?
셋째는, 요나가 불순종으로 들어갔던 스올의 뱃속은 누구라도 상상조차 하기 싫은 순간이라도 들어가 있고 싶지 않은 장소다. 아무리 덩치 큰 생선도 젖국이 되어 버리는 장소다. 뼈까지 녹여 버리는 강산이 눈과 코 가릴 것 없이 밀고 들어오는 장소다. 생선 썩는 지독한 냄새를 맡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진원지다. 물고기가 제멋대로 헤엄치기에 심한 풍랑에 뱃멀미를 할 때의 모든 고통이 다 임하는 장소다. 토하고 싸고… 모든 것을 다 주고서라도 순간이나마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소원하게 되는 산지옥이다. 말 그대로 스올의 뱃속이다. 니느웨로 가는 배 앞에 요나를 토해 내어 배를 타고 가게 하지 않고 물고기 배속에 삼일을 가둬 두었다가 니느웨 뭍에 토해 내게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아직 예수님 모르는 사람은 영적 철이 없어서 당연히 불순종과 온갖 죄악 속에 살아간다. 하나님 눈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철없는 자리, 무지한 자리에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믿는다고 해도 다들 우상을 품고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품고 다들 살아간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될 수도 있다. 이 우상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요나처럼 기막힌 태도를 취하면서 살아간다. 차라리 나를 물속에 던지라면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극심한 풍랑 가운데서도 목숨을 걸고 부르짖어 기도할 줄 모르는 것이 우리다. 원수의 나라가 복음으로 인해 우리나라보다 더 잘 살게 되면 배가 아픈 것이 우리다. 그렇게 은혜를 입어 왔음에도 한 가지 섭섭한 것이 있으면 감사보다 섭섭한 것이 앞서는 것이 강퍅한 우리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우리에게 기막힌 변화의 장소를 요나서는 제공을 한다. 누구라도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바로 그 요나의 뱃속의 삼일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경험하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 12:40)” 인자의 부활의 영광은 스올의 뱃속에 삼일을 통해 일어남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온갖 지독한 썩는 냄새나는 죄의 오물 속에 삼켜 잠긴 채로 삼 일간을 지내시다가 부활하시자 부활의 영광이 온 땅에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요나가 하루 외쳤는데 온 도시가 복음화가 되었듯이, 예수님 제자들이 한번 외치면 3천명, 5천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급하고 강한 바람에 들불이 번지듯 일어난 것이다.
요나가 스올의 뱃속에 삼일 있었을 때의 마음이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했는가?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요나 2:8-9).” 스올의 뱃속에서 나와 복음을 전하니까 하루 전했는데 온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왔다. 정작 복음을 전한 요나는 이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옛날로 돌아가 버렸다. 요나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복음에는 세상을 변화시킬 엄청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온전한 회개에 능력의 비밀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구원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화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끝없는 사랑과 긍휼과 인내와 은혜와 가르침과 인도하심에 자발적으로 계속 순종해 나갈 때 일어난다. 스올의 뱃속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온전한 회개를 위한 스올의 뱃속 같은 하나님의 배려를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준비해 놓으셨음에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이 여기에 있다면 스올의 뱃속이 아니라 그 어디라도 망설일 수 있으랴. 주님을 따라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함으로 온전한 헌신을 올려 드리는 마음자리를 사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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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