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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지키는 탕자

누가복음 15:1-3, 25-32
김도완 목사

(뉴저지장로교회)

누가 주인공인가?

 

오늘 본문은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불립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한 뒤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뒤늦게 회개하고 돌아오자 아버지가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였다는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까지만 알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그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던질 질문은 이 비유의 주인공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둘째 아들이라고 대부분 생각합니다. 누가 진짜 주인공인지 알기 위해 배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는데 그들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예수라는 랍비와 마땅히 함께 있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세리와 죄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너무 비천하고 더러운 자들이어서 어떤 랍비도 더불어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의 태도를 본 예수님이 던지신 비유가 바로 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럼 이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네, 당연히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더러 들으라는 것이지요. 

비유 밖에는 예수님과 죄인들과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비유 안에는 하나님과 방탕한 둘째 아들과 성실한 첫째 아들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비유 안에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습니까? 그럼 이 비유의 타겟이 되고 있는 비유 밖의 종교인들에 해당하는 비유 안의 인물은 누구입니까? 바로 큰아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비유의 주인공은 바로 큰아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가 아닌 '집 지키는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집 지키는 탕자

 

큰아들을 집 지키는 탕자라고 부르는 이유를 좀 더 살펴봅시다. 25절을 보십시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잃었던 둘째 아들을 맞은 아버지가 벌인 이 잔치는 잃은 자녀들을 찾으신 하나님이 벌이신 천국 잔치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방탕한 동생을 따뜻이 맞이한 것도 모자라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벌였다는 말을 들은 큰아들은 시기심에 화가 나 그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큰아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으나 천국 잔치의 기쁨은 모르는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천국의 기쁨을 모릅니다. 불만과 시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몸은 하나님의 집에 있으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큰아들과 같은 상태에 빠지는 것일까요?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버지를 섬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염소 새끼 때문입니다. 그가 동생처럼 집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염소 새끼 때문입니다. 염소 새끼는 보상을 말합니다. 섬김의 결과로 주어질 상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율법주의 신앙에는 결코 천국의 기쁨이 깃들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 중 가장 저급한 것이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보다 조금 나은 것이 보상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수님과 바울 사도와 성경이 일관되게 거부하는 율법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보다 조금 더 나은 것이 있다면 의무감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가장 고급스러운 동기부여는 바로 사랑입니다. 상벌이나 의무감과 상관없이 오직 사랑 때문에 하는 행동,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르치는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사의 질문에 첫째로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큰아들이 집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상벌 혹은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몸으로는 떠나지 않았으나 대신 마음으로 떠나있었습니다. 그래서 집 지키는 탕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동생보다 더 위험한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자신은 집을 떠나지 않았다고 여기기에 아버지께 돌아갈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는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인은 이웃과의 관계 역시 파괴되어 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 동생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동생이라고 부르기도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송아지 같은 은혜를 주시는 꼴은 더더욱 못 봅니다.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이는 자기가 지키는 규정들을 못 지키는 이들을 보면 못 참습니다. 게다가 그런 이들이 큰 은혜를 누리거나 은사를 받거나 사랑받는 것을 보면 더더욱 시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이런 이들의 경우 진실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의 삶은 종교적 삶에 대한 에너지로 지탱되는 것일 뿐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와 누리는 사랑의 힘으로 영위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풍요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을 채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기독교인 삶의 가장 큰 행복과 만족은 바로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 부족하거나 집이 작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에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 함께 머무는 것을 성경은 영생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며 누리며 즐거워하게 됩니다. 내 지갑에 넣지 않아도, 내 소유로 등록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깊은 만족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중 누구보다 가난하셨고 우리 중 누구보다 많은 고생을 겪으셨고 우리 중 누구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셨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분이 누린 기쁨과 만족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성공적인 삶에 이르는 도구로 이해하는 것은 현대 교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교회가 출세한 사람을 높이고 부자 되는 것을 복 받은 것으로 교회도 부자가 되어야 하고 세상을 섬기기보다 세상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가 모두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그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이 참된 만족감을 누리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이웃과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그제야 방탕한 죄인이 잃어버린 형제인 줄 알게 되고 그를 다시 찾는 것보다 기쁜 일은 없게 됩니다. 참된 전도는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만족감을 모른 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비유는 아버지의 큰아들을 향한 호소로 끝이 납니다. 큰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결말이 열려 있는 것이지요. 그 결말을 우리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실하다고 생각한 바리새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를 떠나는 것을 꿈도 꾸어보지 못한 우리야말로 집 지키는 탕자 큰아들이 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입니다. 혹시 우리가 심판이나 보상, 의무 때문에 교회는 떠나지 않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만족을 잃어버린 채 염소 새끼 같은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다면 큰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호소는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이 됩니다. “여기 아버지 안에서 모든 풍요를 발견하고 잃은 영혼을 향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국 잔치가 열렸다. 너도 어서 마음으로 돌이켜 이곳으로 들어오렴. 그리고 영생을 누리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kpcnj.home@gmail.com

04.2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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