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찬 목사
(주예수교회)
한국의 유명한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삶을 얼마 전 ‘인간극장’이라는 한국의 TV프로그램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그 분의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 했었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분이 20여년 동안 사모님이 병석에 있을 때 돌보시고, 사모님이 소천하신 후에 생신잔치를 할 때입니다. 자녀들이 안쓰러운 마음에 이제는 쉬시라는 말을 했을 때, 김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9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분은 그동안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오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며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삶이 행복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민 와서 부부가 함께 땀을 흘리고, 자녀 양육과 교육을 위하여 몸부림치고 신앙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면서 이민생활의 정착을 위하여 피땀을 흘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질 것 다 가지고 누릴 것 다 누릴 수 있는 요즘보다는 그 때가 더 마음의 행복이 있었을 때가 더 많았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뒤돌아보고, “여보, 그 때가 그리웠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김광석이 부른 노래 중 하나입니다.
저도 이전에 학교 다닐 때에는 가끔 채플에서 말씀하시던 김 교수님의 말씀을 종종 들은 기억이 납니다. 보스턴에서 유학 중에 은퇴 후 인생을 관조하시면서 강연하시던 김 교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분이 100세를 사시면서 이렇게 국민들에게 행복을 주고 의미를 주실 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교수의 급여가 박봉이었을 때이지만, 책을 많이 쓰고 강연을 많이 해서 열심히 자녀들을 다 대학원까지 부양하고 출가시킨 후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을 때, 사모님이 병석에 오래 누워 활동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아내를 오랫동안 마음을 쓰며 돌보았다고 합니다. 자녀들은 이런 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안쓰러워서 아버지에게 고생하셨다고 말하자, 그것은 ‘행복한 고생이었다’고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에서는 한 동네에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동네 사람들이 그 아이를 함께 키운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집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 그 아이는 그 부모의 자녀만이 아니라, 온 동네 모두의 자녀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이곳에 살고, 지역사회와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이만큼 우리가 성장한 것은 우리만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자라면서 살아왔습니다. 부모님, 교회의 목사님, 학교의 선생님, 친구들, 위아래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이 흐른 뒤에 이것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짝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교감하며 나누는 뜨거운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을 받거나 준다고 해도,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주고받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고자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 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내 몸 이렇게 셋을 말씀하셨습니다.
1월 21일은 ‘마틴 루터 킹 데이(M. L. King Jr.)’입니다. 33년 전에 레이건 대통령이 킹 생일(1929.1.15)에 가장 가까운 월요일을 국가기념일로 선포한 날입니다. 저는 킹 데이나 그에 가까운 날이 오면 우리 교회의 선교적 사명(사랑과 정의를 위한 사회선교-Social Mission in Love and Justice)에 비추어서 그의 사상과 삶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킹의 비폭력 인권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공동체’ Be Loved Community 아닙니까” 인류 공동체가 서로 존중 받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 에베소서를 통해서 그 넓이와 높이와 폭과 깊이를 생각하면서 사랑의 삼각형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궁극적인 사랑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킹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높이, 이웃을 향한 사랑의 넓이, 자신을 향한 사랑의 깊이를 정삼각형으로 하는 이상향으로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을 트라이앵글로 하는 사랑의 공동체(Be Loved Community)를 이상적인 사랑의 삶을 사는 인류 공동체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건강한 인격을 성숙시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창조성 위에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성을 추구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비폭력 인권운동을 추구하는 그의 궁극적 삶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표시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사랑의 삶의 첫 꼭지점입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불의를 미워하는 자를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 히브리인 남아 살해 명령을 받은 ‘부아’와 ‘십브라’라는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 아이들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역사 배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단에 의해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인간의 인권을 존중합니다.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우리들 간의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혼자서 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소수민족이지만,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우리끼리만을 위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지역사회와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이 우리의 이민생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종화합 잔치를 20여년 동안 해오고 10여년 이상 토요일 아침마다 먼로파크에 나가서 홈리스를 섬기는 것입니다. 매년 일주일 씩 카리타스를 통하여 50여명의 노숙자의 숙식을 제공하고, ASP(애팔래치안 산골지역 사역)를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연약하고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은 우리의 가치관도 높여주고, 우리의 인생관을 바로 인도해주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이민자들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이며 이기적인 삶이 되기 싶습니까?
한국은 지금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민자들은 10년-20년, 때로는 30년 전의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사고와 생각의 편협함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주 좁고 좁은 인생관을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남을 비평하고 시기하면서 ‘우리 가족, 우리 교인만, 한국인끼리 만을’ 하는 강조하는 모습을 가지기 쉽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부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게토화 된 2등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편협하고, 좁은 생각만을 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한국인 자신을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전통 때문에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잘 열려져 있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삶을 잘 훈련받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폭을 넓히지 않으면, 다른 인종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편협하기 쉽습니다. 중세의 마녀사냥, 한국의 타교인, 타교단, 타종교에 대한 극단주의가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의 교인들도 여러 다른 교단들로부터 온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는 문화와 생활, 소득의 차이, 직업의 다양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다양한 민족, 문화, 경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EM예배에도 백인과 다른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이해와 폭을 이러한 우리의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를 사랑하는 사람은 신랑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엡5:22-33). 즉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유행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적 조류이지만, 성서적으로는 잘못되었습니다. 교회는 신앙의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젊을 때에는 열정으로 살지만 나이가 들면 책임감으로 삽니다. 이렇게 책임감 있는 삶을 우리는 사명감 있는 삶이라고 합니다. 책임감 있는 삶은 우리를 사명감 있는 인생으로 인도합니다. 사명감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완성합니다. 이민 1, 2세대로서, 목사로서, 성도로서, 가장으로서,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또 그것은 어떠한 과업을 완성하게 해주지만, 사명감만 가지고 간다면 거기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 그 사명감만 가지고는 의무감의 부담 속에서만 삽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정의감이 없다면, 어떠한 사명을 완수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명감 때문에 무엇을 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행복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랑 속에서 자신의 가치도 귀히 여기고 올바로 평가하면서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사명감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행복한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3: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