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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로

(사도행전 9:10-19)

김성길 목사 (커네디컷 주사랑교회)

한국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한 집사님 부부의 간증적인 고백의 글을 읽었는데, 그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기가 아주 쉬웠는데,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사는 것임을 알고 나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예전에 비해 훨씬 평안하고 보람됩니다.” 참된 믿음과 신앙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분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아실겁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발 앞서 예비하심 핍박자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인생의 변곡점을 이루는 터닝의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의 광채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순간적으로 사울은 눈을 멀게 됩니다.그리고는 “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내게 이를자가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앞을 볼 수 없기에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다마스커스 성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다메섹을 향하던 사울이었지만, 시력을 상실한 그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다메섹에 이미 예비해 두셨다고 말씀하셨기에, 한껏 기대하고 다메섹에 들어갔는데 사울을 영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두셨다는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던 주님의 음성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침묵의 시간이 사흘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게만 여겨지던 그 순간에 하나님은 조용히 일하고 계셨습니다, 10절에서 12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사울을 위해서 예비해두신 사람을 움직이게 하십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나니아”로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위해 “여호아는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아나니아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사울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한 증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는 사흘이 지나서야 사울 앞에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실체를 지금 당장,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가 되어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상의 순간에 최고의 것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뢰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도리이며 믿음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은 어떠신가요? 혹시 사울과 같이 사방을 볼 수 없고, 사방이 막혀있고, 삶의 무게가 견디기 버거울 만큼 힘겹게 지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정지해있고, 하나님마저도 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가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인생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답답한 그 순간에도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이름을 가진 “아나니아”를 움직이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답답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며 축복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부르시자 아나니아는 그 즉시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응답합니다. 이 표현은 성경을 보면,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콜링하실 때 선지자들이 대답했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이로 보건대 아나니아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반응할 정도로 영적인 시스템이 건강하게 작동하는 신앙인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웰즈(H.G. Wells)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란 단편에 보면, 대주교는 날마다의 습관처럼 그날 저녁에도 성당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날도 언제나 시작하는 기도문처럼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Yes, what is it?)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겁니다. 그런데 대주교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께 열려 있고 사랑과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칭찬과 존경을 받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행22:12). 이처럼 주님께서는 사울이 당신을 박해하던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성의 없이 그를 도우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사울은 주님의 대적자로 살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울을 위하여 다메섹에서 가장 훌륭한 당신의 제자를 예비해두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차선의 것이나 남은 찌꺼기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예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고 믿는다면,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전개되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도 주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이르면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으로, 최상의 것으로, 꼭 필요한 것으로 채우시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사랑의 순종 주님과 아나니아의 대화가 11절부터 16절까지 나옵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때 아니니아는 조금 전에 살펴본 그의 이름이나, 영적인 성숙함, 인격적인 평판에 맞게 ”주님,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게 스토리의 전개상 맞을 텐데,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이유를 답니다(13-14). 지금 아나니아가 말하는 내용이 틀린 말입니까? 아니요, 정확한 팩트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울에 대한 정보를 총 종합한 현실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고, 지혜로운 처사 아니겠어요?

그때 주님께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을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15-16절). 사울에 대한 주님의 계획과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러자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여기에 아니니아의 주님에 대한 신뢰와 영적인 깊이와 신앙의 성숙함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 않아요. 틀린 게 아닙니다. 잘못된 것도 아니고 무모한 것도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타당합니다. 논리성도 있고, 무엇보다도 사실에 토대한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참 매력적이고 달콤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단편집이 있는데, 고참 마귀인 스크루테이프가 이제 마귀 일을 갓 시작한 신참 마귀인 조카 윔우드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해주는 31개의 편지로 되어있는 글입니다.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골수 무신론자 하루는 대영박물관에 갔는데, 그날따라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때 마귀는 그에게 “점심때가 되었으니까 우선 밥먹고 천천히 생각하라”고 속삭입니다. “그래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 급하게 서두를 일이 아니라 점심 먹고 와서 개운한 머리로 다시 생각해야지” 하고 미룹니다. 밖에 나오니까 거리를 지나가는 버스들, 석간신문이 나왔다고 외치는 신문팔이 소년의 외침, 세상은 온통 현실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는 겁니다. 그때 마귀가 그 사람의 머릿속에 굳건한 확신 하나를 심어줍니다. “실재의 삶 앞에 하나님이니 복음이니 이런 것들이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현실의 체감이야말로 하나님이니, 영적이니, 이런 추상적인 논리들로부터 우리를 궁극적으로 보호해주는 안전장치다.” 스크루테이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세기 동안 우리가 쉬지 않고 공작해온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지는 친숙한 일상에 눈이 팔려 생소하기만 한 미지의 존재는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현실적인 삶이 실재적인 삶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분석하고,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현실에 갇혀서는 안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붙잡혀 있으면, 내일도 미래도 하나님도, 천국도 영생도 소유하지 못합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현실, 그럴싸한 명분, 설득력 있는 이유,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여기에 성숙한 신앙인의 진가가 나타나는 겁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런데 우리는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믿겠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면 순종하면 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따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미래도 우리의 전 인생을 책임지시고 축복하시고 승리케 하시며, 죽음을 넘어 천국과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kpc39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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