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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을 베푸는 이웃이 되라

(눅 10:25-37)

고택원 목사 (새한장로교회)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참으로 중대한 것이 영생에 대한 문제입니다.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그 가슴에 실존적인 공허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먹을 것이 많고 쌓아놓은 재산이 많아도 영생의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는 것이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에 대하여 묻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율법교사의 대화를 통해 현대인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지식과 행동의 불일치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행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옳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으로는 안 된다. 이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8:1)라고 했습니다. 둘째,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심리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절)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에 신경을 썼습니다. 현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기를 칭찬해 주면 우쭐해하고 나쁜 말을 들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려 하고 자기의 생각이 가장 올바른 것처럼 행동합니다. 옳게 보이려고 하기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변명을 합니다. 무엇이든 정당화하려고 하며 자기가 옳다는 것을 열심히 내세웁니다. 셋째로, 이웃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결정적인 약점이 고독과 외로움입니다. 아는 사람은 많은 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없습니다. 정작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상의하고 싶은데 마땅히 상의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도 내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이웃이 있어도 함께 아픔을 나눌 줄 모릅니다. 이것이 본문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현대인의 문제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 있고 그 사람 곁을 몇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 불행 당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소유한 사람임을 증거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 누가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33절에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제사장 한 사람이 거기를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도 피하여 갔습니다. 또 한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도 못 본 체 하고 피하여 지나쳤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 그 곳을 지나가다가 죽어 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보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기 ‘불쌍히 여겨’라는 말은 본래의 뜻이 심장을 가리키는 말(스플랑크논)에서 왔는데 이 말의 의미는 ‘동정심을 가지다’‘자비심을 가지다’‘불쌍히 여기다’등의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말은 거의 다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습니다. 예수님 앞에 와서 자기를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문둥병자를 보셨을 때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두 소경이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외쳤을 때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셨습니다. 나인성의 과부가 아들을 잃고 울면서 관을 따라갈 때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쓰인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Compassion입니다. com은 함께, passion은 아픔 고통을 뜻합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하는 것이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에릭 호퍼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고귀한 속성도 잔인한 행동을 초래할 수 있다. 사랑 충성 용기 신앙까지도 잔인한 행동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캠패션만은 선과 악을 초월하여 설 수 있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영혼의 항독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남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합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독일의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충성 때문에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에 대한 신앙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9.11사건의 범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신앙 때문에 그렇게 자살 테러를 행한 것입니다. 사랑, 충성, 신앙 같은 것은 고귀한 것들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잔인한 행동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의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잔인한 행동을 낳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남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주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물질이나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 때문에 자기의 가진 것을 희생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가진 것은 무엇이나 그를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면 주리라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다가 자기들이 손해날 것을 생각했습니다. 즉,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아니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될까, 죽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도와준 것입니다. 나보다도 그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느냐 아니면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먼저 생각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움키는 속성이 있어서 쉽게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곳 미국에 사는 한인 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컬럼비아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그는 명문 고등학교 전체에서 수석을 했기 때문에 컬럼비아대학교에 충분히 합격할 수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면접에서 탈락되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사회봉사 활동을 한 경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면접관이 왜 봉사활동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봉사활동을 할 여유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우리 학교는 당신 같이 남을 위해 봉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면서 그를 불합격시켰습니다. 남을 위해 봉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회에서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참된 교육을 시키려면 먼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그것이 남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웃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장차 성공하면 자기 배만 불릴 것입니다. 오늘 우리 조국의 현실이 저렇게 부정부패가 많은 것은 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 아는 편협한 교육정책이 가져온 결과인 것입니다.

2. 어떻게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용기와 책임을 가지고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34절에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튿날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환자를 부탁했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가한 여행자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사본에 보면 새벽에 일찍 떠나며 그 사람을 부탁했습니다. 새벽에 일찍 떠나야 할 만큼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시간과 돈이 남아서 남을 돕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쁜 시간과 적은 돈을 쪼개어 남을 도운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들이며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별 가치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선한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이론만이 아니라 말씀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있어도 그것을 실천하는 행동이 없으면 그의 지식은 헛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은 길을 가다가 어려운 일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의 기분이 어떠했습니까? 설령 내게서 물질이나 시간의 손해가 났다 하더라도 왠지 모를 기쁨이 샘솟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많을 때 우리의 삶은 윤택하고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면 감사하며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남을 돕는 행동은 분명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 되는 줄 믿습니다.

3. 왜 우리가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37절에 예수님은 청년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진정한 이웃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오직 긍휼을 베푼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나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내 자신을 줄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주는 순간 이웃을 살립니다. 이웃이 사는 동안 또한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이웃이 없는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웃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삭막하고 외롭겠습니까?

Cast Away라는 영화에서 Fedex 직원인 주인공 톰 행크스가 비행기 사고로 어느 바다에 추락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져 무인도에서 살게 됩니다. 그는 약혼녀에 대한 사랑의 집념 때문에 몇 년 동안을 혼자 살면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데 너무도 외로워서 축구공에 눈 코 귀 입을 그려 넣고는 마치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공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중에 뗏목을 만들어 섬을 탈출할 때에 바다 물결에 공이 떠내려가는데 그것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끝내 잃어버리고는 애통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이 누구입니까?? 여러분과 저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긍휼이 여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인이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듯이 주님은 우리 위해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새롭게 하셨습니다. 지상 최대의 만남의 행복, 그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이 세상은 외로움에 지쳐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먹을 양식이나 입을 옷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훈훈한 정이 그리워 불행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리워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자의 친구가 되고 슬픔을 당한 자의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아내가 나에게 잘 대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도록 힘쓸 수가 있습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느끼지 전에 먼저 내 자신이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하겠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일 때는 부부간에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내가 좋은 아내가 되겠다. 내가 먼저 좋은 남편이 되겠다 생각하며 살아가 보십시오. 상대방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서 흐르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아도 아쉽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속 썩인다고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먼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자녀들 앞에 신앙의 본을 보이며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성도가 나에게 잘해 주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이 다른 성도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주위에는 강도 만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지치고 상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강도 만난 사람들의 좋은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 중심으로 살아 왔습니다. 누가 나의 좋은 이웃이냐에만 관심이 많았지 내가 다른 사람의 좋은 이웃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적었습니다.

이제는 나에게서 이웃으로 관심의 변화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받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으로 바뀌기 바랍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해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꼭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다가 가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긍휼 베푸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만나면 왠지 반갑고 마음이 흐뭇한 사람입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 만나면 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꼭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야 할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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