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수 목사 (라스베가스 안디옥교회)
최용덕씨는 가족처럼 지내던 친구와 사소한 의견차이로 언쟁을 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다가 관계가 멀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성령님이 이 사실을 되돌아보게 하시고 마음을 아프게 하셨다. 그날 밤 친구를 찾아가 먼저 용서를 빌고 화해하고 그 친구와 함께 노래를 만들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라는 곡이다.
한 집에서 한 솥밥 먹고 살면서도 원수처럼 남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겉으로는 친한 척 하지만 속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는 관계가 있다. 사람들 가운데는 화해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먼저 말하지 못해서 화해하지 못해서 “불편한 진실”을 가슴에 품은 채 지내는 관계가 많다. 라반과 야곱은 장인과 사위관계인데도 지난 20년 동안 서로 속고 속이는 불편한 진실관계에 있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겉으로는 친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미워하며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왔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문제의 책임이 항상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혼자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야곱은 이런 ‘불편한 진실’관계를 청산하려고 라반 모르게 야간도주했다. 이제 라반은 야곱을 공격하려고 하지만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선악간 말하지 말라” 즉, 서로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용서하라고 명하신다. 야곱이 미웠지만 라반은 이런 하나님의 개입에 야곱을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니 상황이 제대로 보인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니 야곱은 적대시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내 사위이며 가족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야곱에게 속한 것, 즉 야곱의 아내는 라반의 딸들이며 야곱의 자식들은 라반의 손자들이었고 야곱의 양 떼들도 모두 라반이 약속대로 품삯으로 준 것이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니 이 가족개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라반은 서로 언약을 세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한다. 야곱도 갈등을 이 시점에서 멈추고 싶었던 터라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즉시 돌기둥을 세우고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고 해서 큰 돌무더기를 세운다. 그들이 돌무더기를 다 만들어놓고 ‘먹었더라’는 이야기는 그들이 온전히 화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유없이 가끔 토하는 사람은 그 속에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고 육체적으로 이무런 이상이 없는데 손과 발이 자주 저리고 마비되는 사람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병이 되어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 갈등의 문제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암세포가 꾸준히 생성되기도 하고 신경통, 위계양이 생기고 또 밥만 먹으면 이유없이 설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용서프로젝트’의 설립자인 Pred Ruskin 박사는 수년 동안 심리학과 의학을 접목시킨 연구를 바탕으로 “용서”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용서할 때 스트레스와 분노가 감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여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당신이 남에게 복수하면 그 기쁨은 잠깐이지만 당신이 남을 용서하면 그 기쁨은 영원하다”라고 했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는 이런 말한다. “용서로 치유받는 최초의 그리고 많은 경우,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이다... 진실 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준다. 그러고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랬다.
세상 살다보면 우리는 독한 화살에 맞을 때가 있다. 친구에게 남편을 빼앗긴 사람이 있다. 친구에게 돈을 사기 당한 사람이 있다. 심한 모욕을 당한 사람이 있다. 집단 따돌림을 받은 사람이 있다. 모두 다 화살을 맞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때 화살을 빼고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떤 놈이 화살을 쏘았어. 그 놈이 내게 활을 쏴? 그럴 수 있어!” 그러면서 그 원수를 찾아다닌다. 원수를 그 독과 함께 품고 사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죽고 만다.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나 용서는 위대한 힘이 있다. 병든 몸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고 흐트러졌던 인격을 가다듬어주는 위대한 힘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영혼을 풍성케 하는 놀라운 능력도 있다. 복음의 내용이 용서이고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용서이다. 우리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고 십자가로부터 용서를 제하고 나면 어긋나있는 나무토막만 남을 것이다. 우리 모두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건강하게 장수하면 좋겠다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