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빌한인장로교회)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 1-3)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가지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다투지 않으신 예수님(Jesus Did Not Quarrel)
첫 번째 예수님은 다투지 아니하신 분이십니다.(마 12:19) 예수님은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온갖 악한 말을 지어내고, 궤계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도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피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바 있습니다.(마 10:23)
어느 들판에 네 마리의 황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황소는 풀을 뜯을 때나 잠을 잘 때도 늘 함께 할 정도로 친했습니다. 위험이 닥치면 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자 한 마리가 거대한 황소들을 호시탐탐 노렸으나 네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힘에 버거웠습니다. 어느 날 사자는 약간 뒤처져 풀을 뜯는 황소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야 이 바보야! 너는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보는 것 모르지!" 사자는 다른 소들에게도 차례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네 마리의 황소는 서로를 배신자라며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소들은 서로 세 친구가 자신을 왕따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황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사자는 황소를 공격해 네 번의 거대한 식사를 제공받고 말았습니다. 사자는 황소의 마음에 불신과 미움의 씨앗을 던져 서로를 미워하게 하여 서로를 공격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가정 혹은 교회를 허물기 위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불신의 씨앗을 던진 후 서로를 미워하게 해서 무너뜨립니다. 교회도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서로 미워하게 해서 무너뜨립니다. 사랑과 믿음은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지키는 굳건한 방패가 됩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싸움닭 같은 집사, 싸움닭 같은 권사가 있으면 안 됩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딤전 3:3), (딤후 2:24), (딛 3:2) 바리새인들처럼 다투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처럼 온유함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신 예수님(Jesus Did Not Raise His Voice)
두 번째 예수님은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들레지도 아니하리니"(마 12:19) 영어로 He will not quarrel or cry out이라고 합니다. 여기 "들레는 것"은 야단스럽게 떠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소리 높이는 것은 귀신들이 하는 짓입니다.(막 5:5), (막 9:26) 귀신들이 역사하는 곳은 한밤중이나, 새벽이나,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운 소리가 멈추지 않습니다. 거듭나서 예수 믿는 점잖은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떠들며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크게 소리를 지르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마 12:18)라는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과 능력을 보이시고도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막 3:12)고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소리가 큽니다. 봉사하면서 큰 소리가 납니다. 특히 회의할 때 너무 목소리가 큽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사람은 누가 자기를 칭찬하든, 욕하고 비난하든, 화를 내거나 들레지 않습니다. 자기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런 들레지 않는 예수님을 본받기를 원합니다.(갈 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 예수님(Jesus Did Not Break the Bruised Reed)
세 번째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십니다.(마 12:20) 초로인생(初露人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풀에 이슬 같은 인생이라는 이 말도 역시 인생의 무상함과 연약함을 우리에게 여실히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갈대는 이렇게 약하니 상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상한 갈대를 흔히 돌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꺾어 버리고 밟아 버리는 것이 보통이 아닐지 싶습니다. 상한 그릇은 내어버립니다. 병든 짐승은 혼자 죽으라고 내버려 둡니다. 매일 보도되는 우리의 사회 실정을 여러분이 보십니다. 적자생존이니, 자연도태니, 약육강식이니, 이런 말을 인류사회에까지 적용하게끔 된 세상입니다. 생존경쟁에 낙오한 자는 넘어집니다. 상합니다. 죽습니다. 어떤 때에는 감옥에서 썩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사역 중 많은 시간을 상한 갈대와 같은 병든 인생을 고쳐 주시는 데 쓰셨습니다. 몸이 상한 사람, 마음이 상한 사람, 한센병자, 중풍 병자, 시각장애인, 손 마른 자, 청각장애인을 고쳐 주셨습니다.(마 4:23) 예수님은 세상의 희망이십니다. 넘어진 자, 쓰러진 자, 우는 자, 짓밟힌 자, 어둠에서 방황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답이며, 열쇠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습니다.(막 2:17)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닮아 서로 사랑하여 어떤 일에도 다투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고, 예수의 마음을 닮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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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