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섭 목사 (에벤에셀 선교교회)
대강절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고급스러운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캐럴, 산타클로스를 등장시켜 상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상혼을 조성하기에 바쁘지만, 반면 여기저기서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즐거운 소식들이 각종 언론매체들을 통해 많이 들려온다.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다 귀한 마음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소식들이다. 많은 사회단체들과 교회들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금씩 돈을 모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는 소식, 홈리스들과 장애인들을 찾아가 식료품과 의복을 지원하며 외로운 독거노인들에게 사랑의 선물바구니를 만들어 전달했다는 소식, 경찰서와 소방서를 찾아가 선물을 전달하며 그들의 수고에 감사하고 격려했다는 소식, 병상에 누운 환자들과 너싱홈을 찾아가 위로하며 기도해주고 왔다는 소식, 필리핀을 위해 재해성금을 전달했다는 등 아름다운 소식들이 계속 들려온다.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작은 것이 나마 소외된 이들에게 베푸는 손길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많은 이들이 이렇게 베풀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모두가 직, 간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따듯한 사랑의 정신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이 행한 귀한 소식들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저들에 못지않게 사랑을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런 귀한 나눔은 성탄의 절기만이 아닌 연중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해본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지의 그 본질을 바로 알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기회가 된다면 더더욱 아름다운 대강절기가 될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본체로 이 땅에 오셨다. “큰 기쁨의 소식”이란 바로 “구주”가 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구세주와 주님으로 나신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 이 세상 풍속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육체와 욕심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결국 심판과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건지시기 위해 오신 것이 곧 “기쁨의 좋은 소식”인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이런 기쁨의 좋은 소식이 그늘지고 소외된 모든 이들과 아직도 주님을 거부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전해지는 절기가 되도록 기쁜 소식의 전달자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과 섬김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으며, 자신을 낮추시고 죽으심으로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다. 또한 그분은 친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니라” 하셨다. 그런데 그분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다는 고백을 하면서도 겸손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영적인 교만, 지식적인 교만, 물질적인 교만, 남보다 더 많이 섬긴다는 봉사의 교만, 명예와 경력의 교만 등. 이제 겸손을 회복해야겠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되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며 그리스도만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대접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대접하는 자세를 가지고, 높임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자들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군천사들이 부른 노래가“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라 했다. “평화”란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Broken Relationship”이 되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참된 화평을 이룰 수 없다. 부부간에 화목, 부모자녀간의 화목, 성도들끼리 화목, 동족들과의 화목, 타민족과의 관계에서도 화목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히 교회들마다 주님 탄생하심을 노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나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미움, 분노, 다툼, 분열과 저주가 아닌 사랑과 용서, 포용을 통한 화목이 회복될 때 진정한 성탄의 아름다움이 나타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