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최근에 한국의 한 신학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고 석좌교수로 위촉된 위르겐 몰트만 교수는 독일에서 출생했는데 독일군으로 징병되어 2차 세계대전 중에 벨기에와 영국에서 전쟁포로로 3년간이나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64년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한 이후 세계 기독교계에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우며 전후에 절망하고 있는 세대들에게 희망의 전도사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학은 세계대전 후 초점을 잃고 헤매던 서양사회에 새로운 기독교적 희망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흑인신학, 한국의 민중신학에도 영향을 끼쳐 현대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이 있다. “기독교는 앞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현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희망이다.” 그는 종말론에 근거한 행동주의자이기도 했는데 그의 신학의 전체 요지를 “교회는 미래의 희망(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근거해 현재의 사회변화를 위해 일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파악한 하나님의 실체는 오늘 우리를 위해 함께 고난당하는 분이시다.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보면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 유명한 엘리 비젤의 책을 인용하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치 친위대가 수용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청년 하나와 어린 소년을 교수형에 처했는데 청년은 일찍 숨을 거두었으나 몸무게가 가벼운 소년은 1시간 반이나 버둥대지만 죽지 않으며 괴로워했다. 그 때 뒤에 있던 누군가가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하고 조용히 혼잣말로 물었다. 그러자 엘리 비젤의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은 저기 저 소년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려 계시지 않느냐?’ 이 일을 경험하면서 엘리 비젤은 하나님은 죽었고 희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몰트만은 이 일에 대해 해석을 달리한다. 그는 이 사건에서 오히려 희망을 보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함께 고통당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가질 이유라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고통당하는 우리는 외롭지 않다는 것이 몰트만 교수의 주장이다. 그가 이번 한국 방문에서 행한 연설 중에 가슴에 잔잔한 감동으로 남겨준 말 한 마디. “삶에는 늘 고난이 있지만 그것이 전부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교회도 종종 위기에 처하고 고통을 당한다. 때로는 위기가 콕 찍어서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당하는 문제들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어떤 것들은 우리가 아무리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풀 수 없는 엉켜진 실타래 같은 곤혹스런 문제들도 있다. 그러기에 교회에 오면 주님이 주시는 평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아픔이 교회 안에 다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고통당하시는 것이며 함께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와 머리를 맞대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사역을 열심히 하는 분들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더 많이, 자주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교회 일을 하지 말라고, 그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권하기도 한다. 편하기는 할 것이다. 단순히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면.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없고, 그것이 우리 삶에 보람을 주는 것도 아니다. 신앙생활은 편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참된 보람을 찾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역을 감당하는 고통 속에서, 그리고 온갖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에 대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주의 일에 더욱 항상 힘쓰는 자가 될 때에 가을의 알곡처럼 열매를 거두는 날이 기어코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