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얼마 전 정신질환 문제를 다루는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강사는 비슷한 환경에 사는 자들이라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있는 반면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형편이나 처지가 남달리 더 어렵거나 고통스런 것이 아닌데도 유독 어떤 사람은 정신병에 걸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삶에 찾아오는 문제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에서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좋은 기술로써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억압으로 받아들인다고 주장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삶을 지혜롭게 살 수 있는 기술(The Art of Living)이 필요하다. 같은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고난을 축복으로 만드는 비결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징계/discipline)으로 가르친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히12:7)를 NIV는 “고난을 훈련처럼 견뎌내라(Endure hardship as discipline)”고 번역하였다. 옛날 양반집 자제들은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천민의 자녀들은 그런 훈련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었다. 군대의 장교들은 일반 사병이 받는 훈련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 높은 훈련을 오랜 기간 받고 견디면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길러나간다. 이렇게 보면 훈련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이나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것도 따지고 보면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훈련은 유익한 것이다. 인간이 20년 넘는 교육을 받는 이유도 결국 그 교육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군인들에게 가혹한 훈련을 시키는 이유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훈련 때 흘린 땀방울과 전쟁터에서 흘리는 핏방울은 반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훈련을 단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놀라운 축복이 된다. 얼마 전에 친구 목사가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여행을 왔다. 그는 신학생 시절에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가난할 때 자가용을 타고 다녔을 만큼 여유있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엌에서 기름으로 음식을 튀기다가 불이 붙어 그 불을 끄는 과정에서 불과 기름 위에 미끄러져 뒹구는 바람에 전신의 43%에 3도 화상을 입는 고통을 당하였다.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수없이 반복된 화상치료와 온 몸이 오그라드는 후유증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수 년 후에 휴양차 시골에 들어가 살다가 부탄까스가 터져 또 한 번의 화상을 당하였고 그 뒤에는 또 뇌졸중과 디스크에 시달려서 친구들은 그를 향하여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하곤 하였다. 나는 그가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멀리서 들을 때마다 그가 겪을 아픔에 오금이 저려 하면서 “Why?”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온 성격이 괄괄한 사모에게 물어보았다. 남편이 그렇게 고통을 당할 때 어떻게 도왔느냐고.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정반대였다. 자신은 욥의 아내와 같은 악역을 했노라고. “당신 정말 하나님의 종 맞냐?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에게 고통을 주시는데도 목회를 계속 할 거냐?”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는 그런 기가 막힌 고난 속에서 마치 욥처럼 단 한 번도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사모가 야유하고 조롱하면 눈 딱 감고 가만히 있다가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하고는 뒤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욥처럼 입술로 범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런 훈련 속에서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를 설명하였는데 그것 역시 욥이 말년에 갑절의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그가 받은 축복 역시 놀라운 것들이어서 그의 간증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민의 삶이 척박하다보니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이 만만치 않다. 병에 걸려 고통하고, 경제난에 부닥쳐 삶의 기초가 무너지고, 가정이 깨져 정서적으로 안정을 잃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고난에 “Why?”라고 물으면 답이 없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고난을 훈련으로 받아들이고 ‘How?“를 물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고난의 강을 건널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고난을 길이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입으로 불평하여 죄를 짓지 말고 순전함을 지켜야 한다. 또한 강한 영적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 웬만한 어려움 앞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담금질을 해야 한다. 그렇게 자원하여 훈련 받으면 굳이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