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춘길 목사 (뉴저지 필그림교회)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22:11)는 말씀에는 마음, 말, 관계의 세 요소가 이 구절에 담겨져 있다.
임금과 친구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특별한 자랑이요 큰 재산이다. 누구누구가 내 친구라고 유명인을 들먹이며 자랑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그러니 나라의 임금이, 국가의 대통령이 내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랑거리인가? 어느 집을 방문했더니 전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과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거실에 걸려 있었다. 같이 갔던 사람에게 이 집 주인이 클린턴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냐고 물었더니, 선거캠페인 디너에 참석하여 기부금을 내고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 온 나라를 통치하는 주권을 잡은 임금조차도 스스로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곧 입술에 덕이 있는 사람, 덕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덕언은 정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오늘 말씀은 가르친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내 마음을 정결하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다. 사람을 얻는 것이 수단이나 미사여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덕스러운 말에 있음을 새롭게 깨닫는다.
말 따로, 마음 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특히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 중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수를 믿으면 말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 이유는 받은 은혜를 나누고, 깨달은 복음을 전하고 싶은 심정 때문일 것이다. 오늘 잠언의 말씀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진심에서가 아닌 형식적으로 하는 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도 “기도해보겠습니다” 또는 “기도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인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는 기도하는 일은 까맣게 잊고 지내면서도 또 비슷한 상황이 되면 쉽게 기도를 들먹이는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을 피해가기 위한 좋은 수단으로 사용하던 이러한 언어생활부터 새로워져야 함을 깨닫는다. 별 악의가 없는 말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작은 일에서부터 진실하지 못하다면 결코 신실하고 덕스러운 인격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호칭 중 가장 영광스럽고 부러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하여 “나의 벗”이라고 부르셨다. 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사는 것처럼 자랑스럽고 신나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세상에 출세한 사람, 권력 잡은 사람, 인기 높은 유명인이 자신의 친구라고 으시 대는 사람들 어느 누구하나 부러울 것 없지 않겠는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시니 말이다.
누가 감히 하나님과 버금가는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비슷한 수준에 다달아서 그의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요, 아브라함 역시 은혜로 그러한 호칭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오늘 잠언의 말씀에서 그 가능성을 본다. 하나님의 마음과 그의 진리의 말씀으로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꾸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사는 자, 순수와 성결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덕스러운 말을 나누는 자, 마음과 말이 하나가 되어 신실함으로 덕을 세워나가는 자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나의 벗‘이라고 불러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