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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통 크게 양보하라!

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최근 어떤 교단총회에서 목사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분열되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기독교회 전체가 비난을 당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격추당하고 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된다. 약한 교인들은 교회 자체에 등을 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교회도 일종의 사회이기 때문에 이런 현실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다. 만약 한쪽 편이 악한 꾀로 문제를 심각하게 어렵게 하거나 이단의 세력이 파고들어서 생기는 문제라면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감수해야 할 어려움이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힘겹더라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진리와 정의의 깃발을 선명하게 들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많은 문제가 진리의 싸움이기보다는 정서적, 관계적인 갈등으로 생긴다. 초대교회에도 갈등이 있었고 파벌이 있었다. 예루살렘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등등 기라성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았던 이런 초대교회들의 공통점은 교회 내에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서로의 성향 때문에 어떤 파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런 그룹끼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경쟁도 하고 견제도 하면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파벌은 용납하는 것이 더 나은 면도 있다. 사람은 소속감을 느낄 때 행복하고 자기 나름의 역할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에 관계를 위해서든, 사역을 위해서든 소그룹을 형성하여 소속감을 심어주고 소그룹에 충성하게 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면이 많다. 다만 파벌이 지나치면 “파벌주의(factionalism)”가 된다. 파벌주의란 공동체에 해를 끼치며 파괴시키는 독소다. 파벌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자기 파벌만의 유익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공동체가 어떻게 되건 말건 상관치 않고 자기 계파만의 유익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함께 망하는 길을 택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로 물고 뜯다가 함께 망한 공동체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성령충만하고 구원의 역사가 힘있게 일어났던 예루살렘교회에도 갈등이 있었다. 구제라는 좋은 사역을 놓고 서로 시험이 들어 갈등관계에 빠져 들어갔다. 이럴 때 우리는 먼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 사는데 어찌 문제가 없겠는가? 일하다보면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자기 쪽 사람들을 더 챙길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속하지 않은 쪽의 사람들의 사정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예수 믿는 자들이 어떻게 싸울 수 있느냐?’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관대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문제를 풀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보다 어떻게 문제를 푸는가이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보다도 생긴 문제를 성숙하게 풀면 성숙한 공동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루살렘교회는 성숙한 교회였다. 무엇보다 먼저 사도들이 문제를 책임지고 나섰다는 것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들은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들보다도 자신들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또한 표피적인 문제만을 보지 않고 문제의 근원을 파악한 데서 그들이 탁월한 지도자들임을 드러냈다. 자신들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고 정리하였다.

또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지도자들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따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어떤 갈등에서든지 절대 선한 편이나 절대 악한 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로 책임을 묻고 옳고 그르고를 따지다가 더 큰 싸움이 나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옳은데 상대는 100%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책임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누군가 자신의 잘못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예루살렘교회의 성숙은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로 한 이후에 당시 주류에 해당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소수계요 비주류인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리더십을 전폭적으로 양보한 사실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를 뽑는데 모두가 헬라파였다. 스데반을 비롯한 7명의 리더들이 모두 헬라파라는 사실은 초대교회가 얼마나 성숙한 공동체였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숫자가 훨씬 많은 히브리파가 밀어주었기 때문에 주어진 결과다. 통 크게 양보하는 히브리파 유대인 성도들로 인해 교회의 위기는 해결되었고 교회는 이후에 놀라운 부흥의 축복을 경험하였다. 누군가 먼저 통 크게 양보해야 다 같이 산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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