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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부활에서 부활로

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영광스러운 부활절 아침이 밝았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과 함께 하는 부활절은 일년중 가장 희망찬 절기다. 부활절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철저한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사상’이나 ‘철학’이나 ‘신념’이나 ‘신화’가 아니라 ‘사실’이다. 일전에 어떤 유명 종교인에게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꾸 생각나는데 그 어머니가 극락왕생을 했는지, 정말 극락이라는 것이 있는지 질문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종교인은 놀랍게도 교회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니라”는 말을 따라하게 하며 그런 거 따지지 말고 있다고 믿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답을 하였다.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갔다고 생각하면 좋겠는가? 아니면 죽어서 아무것도 없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좋겠는가? 그러니 천국 갔다고 믿으라.” 그에 의하면 따지지 말고 그냥 무조건 부활이 있다고 믿으라 할 터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바 그리스도의 부활은 철저한 역사성에서 시작한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고전15장). 성경 자체적으로도 부인할래야 할 수 없는 수많은 증거들이 오늘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외치고 있다. 유명한 기독교변증가 조쉬 맥도웰은 청년의 때에 기독교신앙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만 부인한다면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유럽으로 건너가 각 도서관을 뒤지며 연구하였다. 그는 주로 무신론자였거나 비그리스도인이었다가 신앙을 갖게 된 대표적인 지성들을 연구하였다. C. S. Lewis나 Frank Morrison 이외에도 수많은 지성인들이 어떻게 부활을 믿게 되었는지를 연구하였다. 결국 땅거미가 져가는 영국의 작은 도서관에서 “이것은 진리야”라는 말을 여러 차례 외쳐 사서들을 놀래키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부활 신봉자가 되었다. 기독교가 이토록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 개개인의 부활을 이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 그리스도를 뒤이어 수없이 이어질 신자들의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삶을 연습할 수 있다(고전15:31). 죽어야 부활이 주어지니까.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믿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활을 대망하는 신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빌립보서를 통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하였다. 그는 오래전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 잡혔다. 바로 그 신앙이 자신 속에서 날마다 불타오르기를 사모하였다.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몇 년 전 자기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성도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더 이상 성장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교회 뿐인가. 한국교회를 포함하여 오늘 한인교회들의 문제가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을 모르는 교인들로 차고 넘치는 것이 아닐까. 둘째는, 과거에 묶이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지나간 것은 칭찬받을 일이든 비난 받을 일이든 잊어버리겠다고 하였다. 처칠 수상의 말처럼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는 있을 수 없다. 회개할 것이 있다면 회개하라. 갚을 것이 있다면 갚으라. 그러나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어차피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셋째는, 미래지향적인 삶에 몰두하는 것이다. 바울은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전심전력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세를 보여준다. 너무 여러 가지에 신경 쓰는 것은 우리의 달음박질을 더디게 만든다.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고 사명은 큰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에 헌신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푯대를 향해,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부활의 그 날을 향해 줄기차게 달음질해야 한다. 가다가 넘어지면 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가면 된다. 부활이 되면 우리의 낮은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될 것이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날에 누릴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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