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마음
인간은 감사할 줄 아는 존재이다. 큰일은 물론 작은 것에도 고마워할 줄 아는 존재이다. 앞서 가는 사람이 문을 열어주면 고맙다하며, 옆 사람에게 넘겨주는 캔디 하나에도 감사하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고마워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말이 결코 지나치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각과 같은 감사심이 지닌 중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극심한 개인주의 팽배와 현대후기사회의 절대적 가치관붕괴로 인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난 지 제법 오래되었다. 자기 입장에서 ‘감사할 일’과 ‘당연한 일’의 품목을 정해놓고 살며, 스스로 끌어올린 기준 때문에, ‘이런 것까지 고맙다고 해야 하는가?’ 반문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사람 사는 세상에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회는 윤활유 없는 기계 같아서 움직이기는 하나 소리가 나며 쉽게 고장 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정, 교회, 사회 어디에서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적은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계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암보다 내 감기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시대이다. 내가 하는 일은 아무리 적어도 마땅히 고맙다 인사받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리 크고 소중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의 이기적 자화상의 단면이다. 귀한 줄 모르고 소중한 줄 모르고 그래서 고마운 줄 모르는 세상이다. 이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귀하게 여기고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차에서 내리며 감사하다 말하며, 밥 차려준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설교하는 목회자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감사하다 말하자. 감사할 내용의 작고 큰 것을 구분하기 시작하면 감사의 마음이 줄어든다. 세상에 감사 안해도 되는 일은 없으며, 감사에 작고 큰 것은 없다.
또한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흔히 가까운 사람들은 감사대상에서 제외되곤 한다. 결혼과 장례를 치루고 손님들에게는 감사카드를 보내지만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인색하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행사 때문에 잠깐 밖에서 온 분들에게는 고마워하지만 안에서 늘 수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아마 손님을 잘 대접하는 우리네 문화가 그렇고, 또한 늘 곁에 있기 때문에 감사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손님에게 고마워해야 할 몫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몫은 다르다. 손님과 나그네에게 잘하고 감사한다면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잘하는 것이 맞다. 보이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요한의 질문은 오늘의 감사심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바른 감사는 절기를 따라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어머니날은 어머니에게, 아버지날은 아버지에게, 그리고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라고 생각하여, 그 날에만 그 대상에게 감사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감사는 평소의 생활습관으로 쌓여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감사할 수 있다. 감사의 대표적 이미지가 엎드려 절하는 것인데, 평소에 머리 숙여 인사하는 마음이 쌓여있어야 어느 때 어느 일을 만나든 진정한 감사를 표현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깊이 없는 감사가 오히려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지속적인 감사심에서 오늘의 감사가 우러나와야 할 것이다.
형식적 감사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감사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잃으면 감사의 이유도 잃는다. 감사의 이유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사람을 생각하고 사랑을 묵상하고 은혜를 깨달을 때 인간적 표현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감사의 기쁨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럴 때 범사에 그리고 누구에게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손 안에 있는 ‘추수’를 유일한 감사의 이유로 생각하는 시대에, 내 손 밖의 것들에도 감사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말하고 싶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