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훈 목사 (시카고 그레이스교회)
인간에게는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기본이 있다. 윤리, 도덕, 혹은 상식이라 하든, 그것은 종교, 문화, 인종을 초월하여 인류가 지키며 보존해야 할 보편적인 도리이다. 누가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오랜 세월 다양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되었고, 시대가 바뀔 때마다 기존 도덕가치와 새로운 도덕가치의 갈등이 있었지만 발전적 합의의 형태로 오늘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와 현대후기 사회에서는 시대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속도감 때문인지, 여러 갈등이 상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양한 직업윤리의 필요성까지 느끼게 되었다.
동종 직업이나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동료라 하며 이들 사이에는 서로 지켜줘야 할 행동의 규범, 도덕적 기준이 있다. 그 바탕 원리는 직업마다 동일하지만, 직업에 따라 각 영역에만 통하는 구체적 규정들이 생겼다. 특별히 의료, 정치, 언론, 기업처럼, 인간의 생명을 다루거나 삶에 대한 영향력이 클수록, 폭넓은 사회적 신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 비해 비교적 높은 도덕적 기준이 요구된다. 미국은 물론 선진국 대열에 오르는 한국도 이제 전문가의 직업윤리는 분야마다 체계화되어가고 있으니, 그것을 따라야 할 사람들의 성숙한 윤리의식수준만 있으면 될 것 같다.
목사를 포함한 이른바 성직자는 어떤가? 개인 관점에 따라 직업으로 분류하든 안 하든, 성직자 역시 교회 안 밖에서 고도의 신망을 요구하는 전문직임에는 틀림없다. 다른 직종에 비해 도덕보다 우월한 신앙이 구비된 자리이긴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총체적 전인성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고도의 직업윤리가 필요하다. 문제는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독특한 신앙개념이다. 만일 성경적 신앙에 대한 개인적 편견이나 시대적 오해가 보편적인 하나님의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다면 그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신앙은 어떻게 정의되든,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수준을 신앙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해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오히려 보편적인 도덕 수준보다 낮은 자리에 머물고 있다면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앙과 윤리의 상관관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안타까운 모습에 자성하자는 것이다. 강단에서 다른 목회자를 판단 정죄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이단이거나 객관적으로 지적 받아 마땅한 경우에도 강단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자의 주관적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동료를 판단 정죄하거나 설교의 내용을 강조하다보니 다른 목회자의 수치를 필요 이상으로 드러내고, 혹은 자기주장의 긍정성 때문에 다른 목회자 메시지의 부정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어느 교회가 임대하기로 약속된 교회를 다른 교회에서 웃돈을 주고 임대계약을 가로채거나, 다른 교회에 등록된 교인을 의도적으로 찾아 심방하거나, 혹은 이웃 교회의 힘든 소식을 듣고 기도보다 소문배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등은 상식수준의 직업윤리에서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신학교에서 ‘목회(자)윤리학’을 배운다. 소명의식, 개인생활, 가치기준, 궁극적 목표 등 주로 내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많지만 ‘동료들과의 관계’는 빠지지 않는 중요한 영역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홀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교회가 같은 길 간다는 전제가 설정되어 있다. 교단, 지역, 연령 등을 초월하여 ‘동료’와 ‘동료교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다룬다. 우리 수준은 우리가 높일 수밖에 없다. 세인들에게 직업윤리조차 모르는 수준으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목회자 직업윤리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공동가치를 창출해야 할 때이다. 윤리도덕보다 고귀한 신앙이 있으면서도 우리 수준을 높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뿐이다. 어디 목회자뿐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은 모두 넓은 의미의 성직자이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통하는 전문인 윤리의식을 고취해야할 때이다. 우리에게는 상식 이상의 신앙으로 만들어진 직업윤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