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훈 목사 (시카고 그레이스교회)
교회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이요,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거룩한 기관이다. 따라서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교회가 무엇이며 성도는 누구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은 생각이 필요한 때이다. 마침 휴가철을 따라 며칠전 아이들과 함께 간 래프팅을 생각해 봄으로, 성찰의 힌트를 찾아보고자 한다. 7명이 래프팅을 했다. 아이들 네 명을 둘씩 나눠 앞자리 좌우에 앉혔고, 여자 어른 두 명이 중간 좌우에, 그리고 유일한 남자어른이 맨 뒤 중앙에 홀로 앉았다. 한 배에 할당된 네 개의 노는 여자어른에게 하나씩, 남자어른에게 하나 돌아갔다. 문제는 하나 남은 노였다. 네 명의 아이들이 서로 달라고 다툼을 하였다. 결국 일정시간씩 차례대로 하자고 합의했으나, 여자어른은 엄마라는 이유로 쉽게 자기 노를 아이들에게 넘겨주곤 했다. 아이들은 노를 젓기보다는 장난을 쳤으며 배의 진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물에 담가둔 노 때문에 어른들의 노젓기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여섯 시간 걸리는 래프팅에서 아이들은 도움이 안되거나 방해하는 그룹이 되었고, 중간 두 사람은 자기 일에 열심인 그룹이 되었다. 맨 뒤 앉은 남자 어른은 혼자 오른쪽, 왼쪽 번갈아 저으며 땀을 흘린 책임헌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각자 다 자기 때문에 배가 가는 줄 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물속에 집어 넣어둔 노 때문에 배가 가는 줄 알고 있었다. 중간어른들은 헌신적으로 노를 젓는 자신들 때문에 그나마 배가 이렇게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맨 뒤 남자는 자기 없으면 이 배가 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흠뻑 땀을 흘렸다. 모두의 힘이 배를 가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배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 때에도 여전히 강물은 소리 없이 배를 밀어가고 있었다. 우리를 인도하는 힘은 정작 다른데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노젓기가 오히려 방해되자 남자어른은 오른쪽과 왼쪽에 앉은 사람들에게 번호를 붙여주고 구령에 따라 자기순서가 될 때에만 노를 젓도록 하였다. 배가 방향을 잡을 때와 속력을 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노를 젓는 쪽이 달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중간어른들에게도 번호를 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장난만 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한 중간여자어른이 자체적으로 구령을 부른 것이며, 이것이 뒷좌석 남자어른의 구령과 달랐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졌다. 사실 여자어른이 앉은 자리는 배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적합한 위치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구령 덕분에 배가 뒤 흔들린 일이 몇 번 생겼다. 이때마다 남자어른은 자기가 하는 대로 따라오라고 부탁했으나, 여자어른은 오히려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남자어른을 설득하며, 계속 자기가 번호를 불렀다. 남자어른은 번호를 부르려거든 뒤에 앉아서 부르라며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시기적절한 번호를 불러줄 것이라는 남자어른의 기대감과는 달리 여전히 자기방식의 번호를 고집하다가 배가 더 몇 번 흔들리고 나서야 남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자어른은 누구나 인도자를 따르든지, 아니면 좋은 인도자가 되던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여자어른은 하나의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만할 텐데, 자기 자리에 돌아가서도 자주 입을 열곤 하였다. 중간에 카누를 타는 아이들을 만났다. 늦게 출발했는데도 우리 배를 앞질러 갔다. 훨씬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직사각형 스타일의 래프트와 달리 날렵한 유선형이어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양쪽 끝에서 함께 노를 젓는 사람 때문으로 보였다. 둘이 탔는데 둘 다 노를 젓고 있었으며, 둘이 마음을 같이하여 한 박자로 노를 젓고 있었다. 래프트에서는 두 세 사람이 일곱 명을 나르고 있었지만 카누에서는 두 사람이 두 사람을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 단체 안에 생산자와 소비자의 비율에 건강성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같은 배라 할지라도 노젓는 사람과 타고 가는 사람의 비율에 따라 그 배의 속력이 달라지는 것이다.
뜬금없는 래프트 이야기 속에서, 여러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각자 마음을 파고드는 생각을 따라 자신을 돌아본다면 어느 교회를 다닐 것인가 고민하기보다 어떤 교회가 될 것인가 노력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