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의 마지막 목회서신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고 하였다. 여기서 거하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이며 배우고 또 배우라는 뜻이다. 어느 날 무심코 그 본문을 읽다가 당시 에베소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디모데에게는 좀 적절치 않은 권면이 아닌가 생각을 하였다. 이미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사역하고 있는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것은 좀 지나친 면이 있지 않은가! 그 정도는 이미 실천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서 이 교훈은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바울 자신이 순교의 칼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상황인데다가 언제 그 칼날이 방향을 바꿔 디모데에게 향할지 모르기에 바울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박해가 있으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뿐 아니다. 초대교회는 외부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악성종양(암)과도 같은 교회를 변질시키고 어렵게 하는 세력들이 준동하는 교회였다(2:17). 그런 자들을 대처하기 위해서 디모데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디모데에게 있어서 배우고 확신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그가 그의 외조모와 모친으로부터 어릴 때 받은 거짓없는 신앙(1:5)이었다. 환란과 핍박 속에서, 이단과 사이비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모든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순수한 믿음뿐이다. 어릴 때부터 받은 그 순전한 믿음의 저력으로 모든 공격을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바울의 교훈은 바울 사후 초대교회를 지키는 근간이 되었다. 또한 영적 아비 바울로부터 배운 교훈과 삶의 모범들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친절하게 복음을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삶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루스드라 출신 디모데에게는 자기 고향에서 사도 바울이 박해를 당하다가 죽은 줄 알고 시체를 내버렸을 때 부시시 일어나 다시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강고한 모습을 보면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한 시청각교육을 받았으리라.
유명한 인도의 간디는 현대인의 세 가지 죄악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배우지 않는 죄. 사람들은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 배워도 피상적으로 배운다. 다 안다고 착각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배우는 과정을 생략하고자 한다. 둘째는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는 죄. 배우기도 힘들어 하는데 실천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지성인일수록 배운 지식으로 살려 하지 않고 말만으로 모든 것을 끝내려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은 가르치지 않는 죄. 배운 것을 가르치기 전에는 자기 것이 될 수 없음을 모르고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이런 현대인들의 현실이 오늘날 우리의 목회현장에 있다. 후기 현대주의 시대를 맞이하여서는 이런 현대인들의 특징이 더욱 분명해져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 들기 때문에 오늘의 교육현실은 훨씬 더 어려운 형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배와 교육의 현장에서 가르치는 일은 늘 교인들과 영적 전쟁을 치르는 자리가 되고 있다. 교인들은 가급적 설교를 포함한 모든 교육시간은 짧기를 바라고 과제물은 없기를, 그리고 모든 과정은 쉽기를 바란다.
그러나 배우지 않고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고 확신한 일에 거하지 않고는 시대를 거스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시대적 조류에 흘러 떠내려갈 뿐인 교인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실천하게 하고 그 말씀을 또한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여 깨어 있는 신자가 되게 할 책임이 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왜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응답하셔서 살아계심을 나타내는지 체험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운동을 통해서 강건해져 웬만한 병은 넉넉하게 이겨내듯이 영적으로도 강건하여져서 가라지교인이 아니라 알곡교인이, 교회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일감이 아니라 일꾼이 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