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훈 목사 (시카고 그레이스교회)
사람은 뜻을 세우고 실행하는 존재이다. 뜻을 세웠다고 모두 다 실행되는 것은 아니며, 실행된 뜻이 모두 가시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뜻을 세우면 일반적으로 어떤 결과에 도달한다. 그러니 뜻 세우는 일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뜻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생각들을 담금질한 뒤에 소수의 뜻이 선다. 깊은 바다 속을 떼지어 부유浮遊하는 플랑크톤이나 빠르게 몰려다니는 군집 피라미 떼처럼 편린片鱗이라 부를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생각들이, 하루에도 수 없이 우리 마음을 드나든다. ‘순간’이라는 시간의 길이만큼 아주 잠깐 왔다가는 생각이 부지기수이며, 뜻으로 자리잡으면 아니 될 것이기에 스스로 고개 흔들어 떨쳐내는 것도 셀 수 없이 많다. 썼다 지우는 자의적 번복이나 시행 이전의 사思행착오도 보통 겪는 게 아닐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짧든 길든 시간이 흐르면 그 중에 비슷한 것끼리 뭉쳐 하나 둘 구체적으로 정리된 뜻으로 세워진다. 물론 뜻이 섰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세운 뜻마다 모두 결과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기에 많은 좌절을 겪는다. 시도하기도 전에 무너지는 뜻도 있고, 머리속 생각과는 전혀 다른 길로 실행되는 것에 놀라 스스로 멈춰서는 뜻도 있을 것이다. 많은 뜻이 내적 좌절과 외적 도전으로 인해 구부러지거나 꺾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마다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살지만 어떤 결실로 이어지는 것은 참으로 소수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귀소본능을 따라 자기 고향으로 오는 연어와 같다. 바다에 살던 연어가 자기 생명이 시작되었던 강으로 올라와 한 마리당 이삼천여 개의 알을 낳지만 그 중에 장성하여 다시 알을 낳으러 오는 연어는 극히 적다하니, 뜻이 결실로 나타나는 것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시간적으로 짧은 세상, 그것도 지극히 제한된 자기자원(resource)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생각과 뜻이 결실로 이어지는 비율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세월을 낭비(헛된 소비)하지 않고 사는 중요한 길 중의 하나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결실로 나타나도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그것들은 대부분 생각 초기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겠지만 의도적으로도 비교적 일찍 차단하고, 가능한 흔히 말하는 ‘쓸모 있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사실 쓸모 있다는 말은 주의해야 할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생산적사고’라 부르기도 한다. 생각이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결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가치를 창출해내기에는 너무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인간의 인간됨이 결코 ‘생산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복음적사고’ 혹은 ‘성경적사고’이며, 그에서 비롯된 생각과 뜻을 품고 사는 것이다. 세상에 뜻이 많아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선다고 했으니,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뜻을 품고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크고 많은 것이 좋다는 세상에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높고 유명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쉽고 편안함을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고난이라도 견디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너를 생각하며 우리가 중요하다는 것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그리스도인은 홀로 있는 시간에도 자기의 생각과 뜻을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생각하고 뜻을 세우는 초기 과정에서부터 자기를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래야 아직 오지 않은 결과까지도 미리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무색하지 않으려면 버릴 것 없는 생각만 하고 살면 될 것이고, 그러면 버릴 것 없는 결실을 이룰 것이다.
봄바람이 분다. 사람마다 교회마다 왜 그리 많은 생각들이 드나드는지 모르겠다. 무책임하게 ‘춘몽’이라는 한 마디 던져놓고 지나가는 자유로운 생각들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안될 것 같아서 스스로에게 외쳐본다. ‘우리에게는 복음적이며 성경적인 사고가 버릴 것 없는 생각이자 뜻이며, 그에서 비롯된 결실이 이 땅 사는 동안 이루어야 할 참된 생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