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훈 목사 (시카고 그레이스교회)
2월 초, 고국 전라남도 보성군 어느 교회에서 10살, 8살, 5살 삼남매가 하루 이틀 사이로 죽었다. 그런데 상황을 들으니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가 겹친다. 아이들이 감기증상으로 몸이 아팠는데도, 부모는 의료의 손길을 멀리했고 오히려 아이들을 낫게 한다는 이유로 금식을 시켰다. 더구나 금식중인 아이들에게 심한 매질을 했고 자기들의 생각과 달리 아이들이 죽자, 살려낸다며 사체를 수일간 방치해두었다. 바른 신앙은 둘째 치고 도대체 온전한 이성을 가진 사람인지 묻고 싶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이란 상상조차 못할 만큼 큰 것이기에 가슴치고 후회하고 있을 그들에게 먼저 위로를 전하며 이 일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몇 가지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세상 앞에 사과해야 한다. 물론 그 부모의 신앙이 전형적인 기독교신앙에 위배되는 사이비성을 강조하며 우리는 다르다고 충분히 항변할 수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준 충격에 대해 머리 숙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재발 방지차원의 몇 가지 내부적인 단속이 필요하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해석과 적용 사이의 균형을 놓치다보니 성경 저자의 본래 뜻은 쉽게 간과하고 자신에게 유익된다면 지극히 주관적으로 현실에 적용하는 일이 허다해졌다. 특히 이번 경우처럼 어느 한 구절을 전후 사정과 문맥에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아이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않는다는 잠23:13-14의 말씀은 아이 훈육을 위해서 매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이지, 죽도록 매를 때리라는 뜻도 아니고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는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신학교에서 배우는 성경해석학을 들먹거리며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뜻을 풀어내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교과서적인 성경 해석 정도는 알아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말씀 가르치는 자들의 어깨가 점점 더 무거워짐을 느낀다. 둘째, 신앙과 상식, 자연과 초자연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을 간과하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우리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지만, 또한 상식을 내포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성경은 초자연적인 사건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자연적이며 상식적인 일상으로도 가득하다. 혹자는 이번 사건을 부모의 잘못된 신앙 때문이라 하는데, 그보다는 그들의 몰상식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무리한 금식강요, 치료의 기회박탈, 사체유기 등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몰상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셋째, 잘못된 신앙 및 이단에 대한 심각한 경계가 필요하다. 이번 사건의 장본인들은 목사로 전문교육을 받거나 안수 받은 일이 없는데도 목사라 불리웠다 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목사로 보도했다가 교인이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사이비 혹은 이단은 일상에서도 자극적이거나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며, 성경의 특별한 사건을 일반화 시켜 무리하게 현실에 적용하는 일들이 많고, 하나님의 뜻을 상식과 배타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교회마다 성도마다 이런 유를 경계해야 한다. 또한 사이비나 이단은 자기를 숨기려는 경향이 있으니, 이왕에 이들과 구별되는 방편으로 교회마다 자기가 속한 교단과 목회자의 신학배경 정도는 게시하여 알려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는 사회에 한 가지 이해를 부탁한다. 어느 한 기업이 잘못했다고 모든 기업을 탓할 수 없고, 오늘이라는 시점의 한 번 실수로 누군가의 생애 전체를 부인할 수 없듯, 어느 그리스도인의 몰상식이나 실수로 인하여 기독교 교회전체, 심지어 교회역사성까지 폄훼하지는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사회는 기독교회의 자정기능을 신뢰해야 할 것이며, 교회는 교회대로 신앙의 사회적 순기능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번도 본 일 없는 세 아이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리는 것은, 이 시대와 사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자(死者)가 남기는 무언의 교훈이 있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