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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송상현 목사 (로스앤젤레스장로교회)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존경받는 한 지성인이 폐수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신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수필을 썼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쟌 폴 사르트르입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입니다. 1980년 4월 18일 입원한지 한 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그렇게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때 어떤 사람이 신문에 이러한 투고를 했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가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마지막과 죽음 후에 평가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그의 삶의 마지막이 된다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서 새롭게 역사에 재등장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와는 다른 모습의 죽음을 맞은 한 위대한 생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선교에 목숨을 걸고 사역을 하셨던 하용조 목사님이 65세의 나이로 평생을 사모하며 섬기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죽음의 소식에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서 한국에 내노라하는 정치인들, 셀 수 없이 많은 연예인들,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 그의 시신 앞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한 일본인 목회자는 일본에서 급하게 방문하여 하용조 목사님이 못 다한 일본의 영혼 구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면서 감사의 말과 조의를 표했습니다. 다 같은 작은 관에 뉘여 땅에 묻히는 삶이 이렇게도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일까요?

하 목사님은 복음의 불타는 열정으로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온누리교회를 세워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를 이루어갔습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전통의 틀을 벗어버리고 문화와 예술의 도구를 사용하여 방황하는 사회의 각 계층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했습니다. 자신은 선교에 목숨을 걸었다고 말했던 고인은 전 세계에 2000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섬겼습니다. 간 이식 수술, 당뇨병, 계속되는 투석으로 자신은 움직이는 병원이라고 말했던 고인은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복음의 열정은 오히려 강렬해졌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매 순간 경험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날에도 강단에서 말씀 선포하며 소망과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고인이 트위터를 통해 나누었던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새겨봅니다. “바쁘다는 것과 피곤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아무리 바빠도 좋아하는 것을 할 땐 신이 나지요. 그러나 의무적으로 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할 땐 바쁘지 않더라도 피곤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쁘지만 즐겁고 재미있고 흥분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사십시오” 성경은 바울의 입을 통해 고인의 삶을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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