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훈 목사 (시카고 그레이스교회)
현대문명은 첨단기기의 출산공장과 같다. 경쟁하듯 세상에 내놓는 각종 기기는 그 종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던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그 표현자체가 박물관에 가야할 정도이다. 변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문화발전이나 사회변화의 속도는 이제 따라 잡기가 힘든 지경이 되고 말았다.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는 어느 정도 첨단기기들을 수용해야 하는가? 변화의 속도를 어느 정도 따라가야 하는가? 사실 이런 논의제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속도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과거에도 본질을 상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수용한다는 것에 대하여 많이 고민해왔을 것이다. 성경의 새로운 역본수용, 악기로서의 피아노 도입, 기타와 드럼의 사용 등은 이제 이런 고민의 고전이 되어버렸다. 인쇄소 수준의 칼라복사기, 콘서트홀 수준의 음향시설, 방송국 수준의 무선네크웍시스템, 첨단비디오프로젝트를 넘어서서 3D홀리그램(hologram)의 도입까지 이르렀으니 앞으로도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 수 없다.
왜 이렇게 교회들이 첨단기기 사용에 집중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은 예배에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목회의 핵심요소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각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교회는 사회 어느 기관보다 앞서야 한다는 궁색한 이유를 대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원론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교회가 앞서가야 할 분야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에 기초한 우월적인 도덕성이나 준법성, 예수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기초한 섬김과 사회봉사와 같은 면에서 앞서가야 할 것이다. 교회가 사치와 무분별한 소비문화의 인도자 노릇을 할 수는 없다. 때로는 교회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것을 들여다 놓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높은 첨탑이나 웅장한 실내 장식이 교회의 상징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며, 과거 어느 시절처럼 얼마짜리 건물이니 얼마짜리 파이프오르간이 필요하다는 공식으로 현대사회를 살려낼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대부분의 순수한 교회들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비신앙적인 상업성도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이유가 되었든지 현대문명의 첨단기기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하시는 교회본질을 손상시켜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물론 교회가 문화사각지대는 아니다. 필요한 것을 사용하고 적절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예배와 교회 본질적 사명이라는 시각에서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사역의 분야가 다르고 지역의 문화적 차이, 교회규모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획일적인 표준시안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점검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 사고 싶을 때 그 첨단기기의 사용이 소비자 의식에 젖어있는 성도들의 문화적 욕구충족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혹은 남보다 앞서가는 선진교회를 표방하는 자랑에 치우치려는 것은 아닌지 분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꼭 있어야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더욱 교회와 예배의 본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막연하게 다른 교회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정신차려야 할 것이다. 교회와 예배는 경쟁구도에서 이해할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파워포인트로 친절하게 예배실황을 중계하듯 하니 성경 찬송 들고 다니는 교우들이 줄어드는 것처럼, 역기능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것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편리함이나 비교의식에 기인하기보다는 오히려 예배자들을 가장 예배자 다운 모습으로 세워나가는데 절실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그것은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니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는데 교회는 토굴 속에 갖힌 원시인들의 거처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런 뜻은 아니다. 남들 다 가는 길 가는 것보다 바른 길 가자는 것이며, 무심코 가는 것보다 생각해보고 가야한다는 뜻에서 하는 던지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