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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누구를 위하여 울어야하나?

송규식 목사 (그레이스웨이브교회)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시면서 채찍에 맞아 쓰러질 때, 뒤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무리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요, 죽으신 것입니다. 실상을 살펴보면 심각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죄로 인해 멸망당할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불쌍해 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울어야합니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주님의 말씀은 내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 울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 받기 위해서 울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 잘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울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녀들이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위대한 사업가 되기 위해 울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건강하고 120살이 넘도록 오래 오래 살기 위해 울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주님의 자녀들에게 보너스로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합니까?

첫째로 너희를 위해 울라는 것은 곧 너희 죄를 위해 울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욕심과 악함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직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유혹과 죄를 물리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둘째로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자녀들, 즉 다음 세대의 영적 타락과 패망의 길로 달려갈 것을 이미 아시고 우리에게 주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실로 이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과 개인주의 그리고 다원론적 뉴에이지운동(New Age Movement)에 의한 타락한 사탄문화의 범람으로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라는 말씀처럼 믿음을 지키기가 극히 어려운 때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위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찍이 복음을 받은 나라들은 이미 다음 세대를 잃어버렸으며 복음의 도미노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해보겠습니다. 사사기 2장 7-10절에 보면 여호수아와 그 세대 사람들 즉 가나안으로 이주한 1세대는 여호와께서 광야로부터 요단을 건너 가나안까지 인도하심을 체험한 세대였습니다. 그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를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 다음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는데 소홀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도 철저하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다음 세대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환난을 허락하셨는데 이웃 이방나라로부터 침략을 받고 붙잡혀 갔으며 재산을 잃고 고통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그제야 재를 머리에 쓰고 여호와의 전에서 회개하였습니다. 풍요가 축복만은 아닙니다. 미국도 청교도신앙으로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축복 받은 나라였지만 그 풍요의 결과가 오늘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세상 마지막에는 돈으로 망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녀들에게 돈을 남겨주려 하지 말고 그들이 주의 도를 떠나지 않도록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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