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훈 목사 (시카고 그레이스교회)
복지(福祉)는 누가 무엇이라 주장하든 결국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선진사회의 대표적인 정책들은 인간의 행복증진, 즉 복지향상에 집중되어있다. 하지만 국가정체성을 세워나가기에 급급한 후진 제3세계나라들은 아직 국민 개개인 삶의 질에 대하여 관심 둘 여지가 없다. 물론 동서 간에 첨예한 갈등이 있던 냉전시대에는 선진국이라 해도 국민의 혈세가 대부분 군비경쟁에 사용되었고, 골 깊은 이념대립이 수준 낮은 국민복지의 충분한 변명이 되곤 했다. 그러나 온 세계가 자유시장경제사회로 가는 오늘, 냉전시대의 이념은 이미 구시대 유물이 된지 오래고, 경제라는 새로운 거대이념이 나타났다. 당연히 세계 각 국가는 강한 나라보다는 잘사는 나라를 추구하고 있고 자국 국민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계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은 정치권의 당리당략차원, 혹은 대권후보들의 자기위상높이기차원의 홍보성정책구상이라는 아쉬움이 있고, 또한 안보를 명분삼아 언제라도 국가를 우선하는 정책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인 조국 대한민국이 근래 들어 복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 인간에게 행복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각자 자기가 속한 계층의 이익이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대변하는 것 마냥 주장하는 이기주의 사고가 팽배한 이때에 소외계층을 염두에 둔 복지에 대한 담론은 건강한 사회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차제에 교회는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권에서 다루는 이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 어떻게 이슈의 논의에 참여하며 기여할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 거론하는 복지는 그 좋은 예로 든 것이다. 교회가 직접 복지정책을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렇게 하자는 뜻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개인의 인권과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의 근본가르침에서 본다면 참다운 복지는 성경에서 나와야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협력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인생의 행복을 중요시하였고 약자, 소자에 대한 배려를 단단히 부탁하고 있다. 당시 사회적 약자로 여겨지는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도우라고 했으며 이를 위해 법적뒷받침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신약에서는 이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진정한 경건이라고 한 것을 보면 지상 사회의 복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경건의 저력에서 나와야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어느 누구라도 교회와 국가정치의 관계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끄집어내어 논지를 흐려서는 안 된다. 성경이 명백하게 제시하는 사회복지에 대한 사명을 외면하는 현대교회들의 집단이기주의를 경계하고 성경정신을 위반한 일부 탈사회적 게토화를 진지하게 우려하자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는 정책입안기관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를 선도하고 이끌어갈 영적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교회가 대 사회적지도력을 상실하면 사회의 대 교회적지도력을 받아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며 그런 조짐이 보인지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회상을 일례로 들 수 있다. 언제부턴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상을 따르기보다 사회가 요구하는 교회상을 의식하는 성도들이 늘어났고 이에 발맞추어 교회를 세워가려는 목회적 노력들이 적지 않다. 이는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성장위주의 교회관이나 목회관에 지친 교회들의 무기력 현상일지 모른다. 사회적 교회상이 다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 우리의 근원이냐 묻고 있는 것이다. 복지논쟁에 끼여들자는 의도에서 복지를 거론한 것도 아니다. 장단기적 사회적 논의를 거쳐 합의에 이르게 될 어떤 이슈에 대하여 그때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을 따라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데, 그 역량이 정말 우리에게 있는지도 묻고 싶은 것이다. 고맙게도 그런 힘이 있다면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할 것이고 만일 없다면 부끄러워하며 교회의 대 사회적지도력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