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훈 목사 (시카고 그레이스교회)
지난 10월 31일은 종교개혁기념일이었다. 1517년 당시 교수 사제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비텐베르그(Wittenberg)대학 교회문 앞에 95개 조항의 논제를 내건 것을 종교개혁일로 생각할 때 올해가 493주년인 셈이다. 작년에 칼뱅 탄생 500주년 행사가 많았던 것을 감안할 때 아마 7년 뒤에는 교계 및 학계가 앞 다투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할 것인데 새로운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많은 이때에 무엇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 궁금하다.
주지하는 대로 우리가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 부르는 교회개혁의 역사는 단순히 루터 한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물론 로마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다양한 운동으로 전개됐던 점에서 루터의 공헌이 작다 할 수 없으나 루터의 95조항 반박문 게시를 전후해 유럽 각 지역에서 진행된 모든 교회개혁 의지와 그 운동을 종교개혁으로 생각해야 마땅하다. 여러 면에서 부패했던 당시 기독교는 교황이나 지방 사제들을 중심으로 종교권력화 됐고 그 틈에서 일반 성도들은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지도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루터, 칼뱅, 쯔빙글리 등 동시대에 사는 여러 사람들과 단체들을 동원해 이를 시정하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후에도 각 지역에서 교회를 새롭게 하는 개혁적 운동들이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일어났으며 신구교 분립 이후 가톨릭 내부에서조차 개혁 혹은 정화 운동이라 부를 수 있는 움직임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볼 때 종교개혁의 파장은 참으로 컸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을 제2의, 혹은 제 3의 종교개혁시대라 부르고 싶어한다. 단순히 목회 방법론차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대다수는 오늘의 교회현실이 중세 시대와 마찬가지 혹은 그 이상으로 어두워진 점에 대한 호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거룩이나 순결과는 거리가 먼 도덕적 타락,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을 수 없는 반목과 질시,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자본주의 경제논리를 따르는 목회, 화목 직책을 받은 자들의 날카로운 교권다툼, 교회의 근본적인 존재 사명 망각 등에 대한 지적인 셈이다. 하지만 개혁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교회개혁의 필요성이 교회 밖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러겠는가 싶지만 이것은 옆 집사람이 내 집 안방 청소 좀 잘하라고 지적하는 것과 같은 수치이다. 고맙지만 교회개혁은 교회 밖 목소리에 의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내부적 자성의 움직임이 교회개혁으로 이어져야 마땅한 것이지, 교회 밖 ‘주문’에 맞추는 형태의 개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개혁원리가 사회개혁원리나 목적과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기본원리였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 영광이라는 틀에 비추어 우리의 부족함을 도려내고, 새로 세워야 한다.
종교개혁은 개혁가들의 복음 이해에서 시작됐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의 시작도 교회교리나 교회제도가 아니다. 각 개인이 먼저 종교개혁자들의 복음이해, 은혜 감격, 성경 중심 사색과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개인의 개혁 없이 교회의 개혁은 요원하다. 제도개혁이 있어도 제도를 운영할 사람개혁이 없으면 그것은 개악이 되고 만다. 개혁을 위한 개혁이 아니라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실함으로 빚어내는 개혁이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각 개인이나 지역 교회들이 소금의 맛과 빛의 밝음을 기능면에서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에 비추어 볼 때 비복음적인 것을 제거하거나 고쳤던 개혁자들의 길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어떤 제도를 바꾸기 위해 개혁하자는 안 밖의 목소리는 줄어들고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이해에서 비롯한 깊은 회개와 그로인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려는 자아개혁, 내부개혁의 자성 목소리가 커가기를 바란다. 지금은 목회적 방법론이나 제도가 아니라 목회의 주체가 되는 우리 자신의 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병이 깊어지기 전에 치료 해야한다. 그래야 수술 같은 큰 치료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7년후 혹은 더 오랜 세월이 지나도 1517년의 종교개혁을 기념할 뿐 새로운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아도 되기를 소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