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교회, 풀러 Th. M
지난 달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해온 이슬람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근거지 레바논에서 이틀 연속으로 소위 삐삐라는 무선호출기와 무전기 워키토키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바람에 최소 수십 명이 죽고 몇 천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생겼다. 사이버 강국으로 꼽히는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헤즈볼라 입장에서 최첨단 통신기구인 스마트폰은 위치 추적을 당하니까 오히려 한물간 시대의 유물로 취급당하는 삐삐를 이용해야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이런 생각을 해내고는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정보부대인 모사드는 15년 전부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삐삐와 워키토키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하니 할 말을 잃는다. 확실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
이런 일은 기원전 1200년경에도 있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한 것을 계기로 그리스 연합국과 트로이 사이에는 10년 전쟁이 벌어졌다. 이 때 그리스의 오딧세우스가 계략을 짜서 커다란 목마에 병사 30명을 숨겨두고는 트로이와의 전투에서 패퇴하는 척하였다. 승리에 도취된 트로이 군사들은 목마마저 전리품이라 생각하고 성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모두가 승리의 기쁨으로 만취한 밤이 깊었을 때 스파르타의 병사들은 목마에서 기어 나와 성문을 열어줌으로 트로이는 멸망당하고 말았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현대건축의 거두인 미스 반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하나님은 디테일에 계시다”고 한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두 말은 상반된 듯 보이지만 같은 의미다. 어떤 것이 대충 보면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해내려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더 집요한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뜻이다. 끝까지 주의를 기울여 조심하지 않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의도와는 반대로 승리라고 생각했는데 패배일 수 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예루살렘 성벽을 불과 52일 만에 완공하였다. 중장비도 없던 시대에, 성벽이 쌓아질 때 손해를 보는 주변 세력들의 반대와 저항과 살기 가득한 위협 속에서 예루살렘 안팎의 주민들과 함께 불철주야 건축하여 이렇게 대단한 위업을 이루었다. 이것으로 일단 하드웨어는 마련되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 안의 소프트웨어에 집중하였다. 에스라와 함께 영적 각성운동을 벌였다. 성대한 봉헌식까지 마쳤다. 백성들은 호응했고 모두가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렇게까지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안전한가? 아니다.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성벽 건축을 가장 반대하였던 호론 사람 산발랏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사돈을 맺었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엘리아십에 의해 성전 안의 곡식 창고를 방으로 만들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유다인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함으로 민족과 신앙의 순수성에 물타기를 하였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들을 쫓아내고 징계하고야 만다.
이단이란 끝이 다른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겉보기에는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단의 본질은 마귀적이고,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세력은 사탄이다. 이런 세력들도 문제가 디테일에 있음을 안다. 지난 달 로잔대회가 한국의 인천에서 열렸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빌리 그래함이나 존 스토트와 같은 탁월한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된 로잔대회를 네 번째로 한국에서 열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럽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성경관에 대한 분명한 표명이라든가 젠더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이 부족한 것은 악마의 디테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벨상에 대해 깊은 갈증을 느끼던 한국인들에게 노벨문학상은 너무나 큰 감격이었다. 작가 한강 씨가 쓴 작품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실이다. 그런데 그의 책 속의 역사 왜곡이라든가 패륜적, 외설적인 내용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내가 읽은 <채식주의자>는 분명한 청소년 유해도서이다. 하나님도 디테일에 계시지만, 악마도 디테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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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