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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이 시대의 품격이다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부활절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꽃이 피었지만, 봄은 꽃으로 오기보다는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 같다. 수요일마다 모이는 ‘찬양노래교실’에서는 찬양도 부르지만, 청춘시대를 소환하는 가곡도 부르고, 인생 연륜을 노래한 내용이 담긴 건전가요도 부른다. 나름 ‘격랑의 시대’를 살아온 참석자들은 ‘옛친구(하얀 모래 위에)’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동무생각(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을 부르면서는 눈을 창밖 하늘로 향한다. 또한 다양한 찬양들은 신앙인이 아닌 참석자들의 마음도 만지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음악은 이렇게 힘, 선한 영향력을 준다.

방탄소년단(BTS)은 데뷔 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60~70년대를 가슴 뛰게 했던 비틀스나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이상으로 모든 나라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어주고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이들의 음악은 멜로디, 가사, 화음, 랩, 댄스, 목소리 등 그 어느 하나 때문이 아니라 음악 자체가 대중들을 사로잡아버리는 힘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십 년 전의 청춘들이 비틀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에 사로잡혔듯 오늘날은 한국의 젊은이 일곱 명의 어울림이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총선철이다. 뉴스에 소개되는 유세 현장마다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멜로디와 리듬이 있으니 노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세장에서 틀어놓는 음악들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이나 추억을 불러오는 가슴 떨림 하나 없는 소음과도 같다. 섬기겠다는 마음조차 없는 듯 무식하게 패는 도끼소리만 같은 노랫소리에 마음이 아프다. 박자가 있는데 흥은 없고, 멜로디는 있는데 감동은 없는 유세 현장의 노래와 배추 한 단을 외치는 리어카장사치의 깨진 메가폰 소리같은 연설은 초등학생들의 웅변대회의 진지함조차 없는 쌈닭들의 위장된 날개짓만 같아 그 공허함에 가슴이 슬프다. 대통령이 부활주일을 트랜스젠더 기념일(Trans Visibility Day)로 선포했다는 소식은 아픔과 슬픔을 넘어서는 찢어지는 통증처럼 들려왔다.

우리의 시대를 책임져야 할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대선을 앞둔 미국이나 총선이 진행되고 있는 한국, 우리에게 소중한 이 두 나라의 모습이 코리언-어메리칸인 우리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음악이 살아나면, 아니 살아있는 음악이 들리는 유세장이면 좋겠다. 격조있는 풍자와 위로의 선율 속에, 희망을 품은 심장을 쿵쿵거리게 하는 박자와 여야가 화음을 이루어내는 그런 음악은 없을까?

작년 봄, 80세가 넘은 폴 사이먼은 ‘Seven Psalms(일곱개의 시편)’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은유적인 표현의 가사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폴 사이먼은 “아니다. 실제로 또렷하게 들은 말씀을 쓴 것”이라고 대답했다. ‘The Lord is my engineer/ Lord is the earth I ride on…..’  그는 ‘주님이 나의 엔지니어, 음반 프로듀서, 걸어다니는 길이요 대기 속의 얼굴’이라고 쓴 이 노래의 맨 마지막 줄에 ‘주님은…. 살아남은 단순한 진리’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든 노인의 가수가 들었다는 ‘들려온 그 말씀’이 성도들의 고백언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부활절 퍼레이드를 하고, 남미에서는 수난의 십자가 흉내를 내고, 이민사회도 지역마다 연합 부활절 새벽예배를 드렸다는데, 나이 든 가수의 진솔한 신앙고백 같은 순전함과 진지함을 찾기엔 부족한, 또 한 번의 절기를 지낸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생 자체가 진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겸손한 섬김과 거룩한 분노 그 어느 것에도 품격이 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이 시대의 품격’이 되기를 바란다.

djlee7777@gmail.com

04.1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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