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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크라운 그리고 면류관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코로나(Corona)와 크라운(Crown), 왕관(王冠)은 다 같은 뜻을 갖고 있는 라틴어, 영어 그리고 우리말이다. 코로나는 원래 둥근 태양 바로 위에 있는 붉은 채층을 뚫고 뻗어 나오는 대기층으로 평소에는 태양빛 때문에 볼 수 없다가 개기일식 때 태양이 가리어지면서 주변으로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형체가 마치 왕의 존엄과 고귀함을 담은 왕관과 같다 해서 이번 바이러스의 이름을 코로나라고 붙인 것이라고 한다.

원래 DNA나 RNA를 유전체(genome)로 가지고 단백질에 둘러싸여있는 바이러스(virus)는 혼자서는 번식이 불가능하며 라틴어로 poison(독)이라는 뜻을 가진 존재가치도 없어 보이는 존재(?)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인간세상을 보자. 너무도 찬란한 면류관이라는 신학적 이름을 가진, 그러나 혼자서는 증식도 할 수 없는 미물 중의 미물인 바이러스가 감히 최고의 가치를 지닌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하는 인간세계를 초토화 시키고 있다. 가치를 존중하는 인간들의 가장 최고의 가치인 예배조차 바이러스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미래의 세상까지 온통 흔들어놓았다. 지금 우리는 인류의 생존과 생활의 지형이 바뀌고 있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2미터가 채 안 되는 인간을 3-4백미터 되는 다운타운의 고층빌딩만큼 부풀려놓는다 해도 지구 밖에서는 점 하나도 안 되어 보이는 것 같은 비율로 이해해볼 때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는 ‘존재가치’를 자랑하며 살아온 인간의 무능함과 왜소함을 깨닫게 하면서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는 현실을 만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고독을 무서워했고 꺼려했다. 사실 홀로 있다는 것만큼 인간에게 두려운 것은 없다. 우리는 서로 만나야했고, 함께 어울려야 했다. 고독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사회 속으로 들어가 어울리며 위로도 받고 때론 성취감과 만족을 누리며 사는 존재로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어느새 교회도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 수준으로 전락해있지는 않았던가.

어울려 사는 사회적 인간을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런 사람을 모라토리엄(moratorium, 유예)인간이라고 하는데 복잡한 시대가 되면서 혼밥이라는 단어가 일반화 될 절도로 스스로 그 고독의 시간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모임을 중요시하는 교회도 그 영향의 하나로 가나안교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굳이 교회에 가서까지 사람들과 어울리며 피곤해질 필요가 있을까, 혼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인터넷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개인적으로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는데...”라며 나홀로 신앙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증가추세를 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마치 재판의 선고처럼 딱딱하게 사회와 교회를 옥죄이고 있는 상황을 만난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안면노출을 피해라, 사회적 거리(socoal distancing)를 유지해라. 모이지 마라..... 사실 교회를 떠난 홀로신앙을 선택한 사람들이나 교회공동체라는 보호막 안에서 신앙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지금의 사회적 예방지침은 ‘두려운 명령’인 것이 사실이다. 명령할 수 있는 힘은 왕에게 있었던 것처럼, 왕관을 쓴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게 명령했고, 인간들은 그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왕의 복심(腹心)은 왕만 알듯이 코로나바이러스는 자기의 뜻을 아직까지 인류에게 들키지 않고 있다.

예배는 영상으로 대체해 드리고 있다지만 사실 교회가 예배만으로 이루어진 모임은 아니다. 교회의 주어(主語)는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성도들과의 관계, 그런데 그 관계를 끊고 있으라는 바이러스의 명령에 꼼짝없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자. 새롭게 생각해야한다. 지금 이 사태, 이 상황은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임을. 바이러스가 막고 있는 것은 ‘예배모임’이 아니라 ‘함께 모이는 것’일 뿐이다. 그동안 교회는 교회당 건물에 모이는데 집중해왔다. 분명히 모인 후에는 세상 속으로 흩어져 나가야하는 부분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솔직한 교회의 모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며 그 속에서 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내야 한다. 바이러스가 교회모임을 막았지만 성도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 성도와 성도가 영적교제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는 없다.

코로나(Crown)같은 왕의 모습으로 나타난 바이러스는 영광의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영생을 약속받은 성도들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당장 영상예배와 모임들을 하느라 우리의 전통적 예배가 불편해진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방법의 변화가 예배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주는 계기가 되어준다면 이 또한 유익한 부분을 찾을 기회가 아니겠는가. 돌단을 쌓아놓고도 드릴 수 있었던 야곱의 예배, 북한 강제수용소에 억류된 3년 가까운 시간동안 드린 임현수 목사의 나홀로 예배가 가능하듯, 이젠 대중 속에 섞여있는 예배참가자가 아니라 어디서나 막힘없는 나홀로의 예배가 더욱 풍성해질 수 있는 예배자가 되는 기회로 삼는다면 우리는 ‘코로나 왕관’보다 더 찬란한 ‘면류관의 예배자’로 새로운 환희의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COVID19로 인해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예배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04.2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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