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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5 광복절과 건국절은 미국이 지원된 형제의 출산

김회창 박사 (말씀새로운교회 담임목사)

역사는 그 정권의 강약에 의거 세팅되고 현대의 역사는 그 자료들이 숨겨질 수 없는 IT 혁명시기이기에 그 사실이 말하여 준다. 한국의 독립은 전적으로 미국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로 받은 은총이었다. 이즈음에 일본은 아세아 쪽을 먹어 버리고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을 먹으려고 발악하였던 때였다. 이러한 발악을 막고 심판함으로 출발하게 한 것이 바로 맥아더 장군의 세계역사상 유례없었던 사상 최초의 원자탄 투하 작전이었다. 이 원자탄의 투하가 일제의 발악을 막는 비장의 하늘 심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제 천황의 신사참배 강요의 사악함이 멈추었을까? 이때 일본 쇼와 천황은 1943년 12월 31일에 세계에서 제일 깨끗한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거룩한 기독교인 한국성결교회에 교회 폐쇄령을 내렸다. 그 이유가 ‘재림주 천황이 이미 와 있는데 무슨 예수의 재림을 4대 교리로 강조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로인해 수백 개 교회에 대못을 교회입구 문에 박아 패쇠시키었고 주요 교역자들은 고문당하고 교인들은 헤매게 되었다. 그 후에 계속 인간이 지닌 혈통의 맥을 끊어버리게 하는 창씨개명을 하게 했고 전쟁물자 확보 건으로 국가보석들과 구리 밥그릇까지 갈취하는 천하의 사단 짓을 자행했다. 한국인의 주권까지 완전 찬탈한 최악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기본권을 착취한 흉악범이 일제이었다. 이런 사악한 집단이 그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진상이었다. 그러니 그 나라를 다스릴 어떤 방법이 있었겠나? 마지막으로 미 영 소 강대국들이 모여서 1945년 7월 26일에 포츠담 선언을 하여 일제에 권고하였지만 최후의 발악 작전을 더 구상할 정도이었고, 일본군에 정신무장으로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신사에 간다"는 일본의 자살 비밀무기로 정신 무장시키며 결국 그 타협안을 묵살하였으니 그렇지 않아도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이 최후의 심판 작전을 쓸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결국 미국이 만지작거렸던 '맨하탄 프로젝트'에 당시 20억을 투자하였었는데 그 결판을 내야한다는 심판으로 정계를 치닫게 하였다. 미국이 일본에 항복하라고 권하였으나 개무시하였다. 거기서 일본 교토로 신혼여행을 하였던 스팀슨 국방장관의 의견이 개진되어서 그 문화도시를 빗겨가서 군창고와 해군 군항도시인 히로시마에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별칭인 "리틀보이 원폭탄" 곧 우라늄탄을 1945년 8월 6일에 투하하게 되었다. 그래도 항복이 없자 3일 후에 미쓰비스중공업 조선소와 해군군항 사세보시 옆인 나가사키에 플루토늄으로 만든 처칠의 별명인 " 팻 맨 (fat man)으로 원폭탄"을 투하하여 세계 앞에 항복을 맥아더사령관이 받아내었다. 맥아더 장군은 철저하게 사건시마다 사악한 국가 지도자를 심판, 하나님의 대행자로 소명되었다. 미군이 필리핀 전투에서도 일본군에게 2만여 전사 및 더위에 순직 당하였었는데 맥아더가 1944년 10월 20일에 레이테섬 팔로 상륙작전으로 복원하였다. 미국은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까지 기습당하였던 차에 더 이상 일본 천황에 대한 인내력 한계로 일제 땅 군사도시 두 곳에 원자탄 투하로 세계역사의 흐름을 악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으로 보여주었다. 미국 맥아더 장군의 작전으로 말미암아 인도 필리핀 한국 등 참혹하게 당하고 있던 아세안 국가들은 독립의 기회를 받게 되었으니 이를 우리 한국은 해방되었다고 다시 빛을 받았다고 광복절로 기억하게 되었다. 이렇게 1945년8월15일에 해방된 한국에 두 기운이 감돌았는데 소련의 스탈린이 주도하는 공산세력으로 남로당이 70프로이상 강세이었고 미국이 지원하는 뒤 늦게 귀국한 이승만박사가 자유 민주주의 정부수립 기치를 들고 1948년 5월 10일에 동대문갑에 제헌 국회에 단독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었고, 5월 31일에 제1대 제헌의회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곧이어 7월 20일에 국회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과 겨루어 선거로 대통령으로 뽑히어 대한민국을 국호로 건국하는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로서 이승만 박사는 상해임시정부의 첫 수반, 제헌국회 첫 수반, 대한민국 첫 대통령이 되는 자유 대한민국제도, 자유 시장경제 제도의 역사의 출발자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인 1952년 8월 5일에 직접선거제도 개헌에 의거 뽑히었고 그 전통은 70여년이 되도록 지켜오게 되었다. 이때 상황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3년간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었다. 그는 1953년 정전시 즈음에 한미상호보호조약 체결로 한국을 보호케 하였다. 북한은 3대 세습을 거치면서 군사무기화 중심 정책으로 젊은 청년들이 10년간 의무화되어서 사회 적응할 기회를 놓쳐서 오늘날 한국에 60:1의 빈국으로 추락하였다. 한국은 이승만대통령이 기반 해 놓은 터전 위에 짧은 기간의 군사의무와 외국 과학기술 습득과 국민공교육, 조기유학 정착 등을 힘입어 한미동맹 기조 위에 경제 군사안보 문화 교육 체육 과학기술이 기초를 다지었고, 박정희대통령의 산업화가 성공하여 오늘의 세계 GDP 14위, 세계국가경쟁력 6위 대국행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미국 선교사들 추천서 19통으로 미국 조지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톤 대학의 유학과 미국과 연계된 애국활동 생활과 이민자들 교육 보호 활동은 오늘의 한국의 광복과 국가 건국으로 이어져 형제 탄생과 비교할만한 것이었다. 그러한 초석을 놓은 신의 한수로서 우리가 다시 대한민국의 역사를 생각할 때이다. 08.1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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