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훈 목사 (시카고 가나안교회)
오래전 초등학교 시절 방학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위인전기를 읽고 독후감 을 쓰는 숙제였다. 숙제해가느라 적지 않은 위인들의 전기를 읽었었다. 책을 읽고 쓰는 독후감의 포인트는 위인들의 훌륭한 삶에 대한 배울점이다. 위인들의 훌륭한 삶에 대해서 배우고자 하는 생각에 거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은 예수에 대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가진다. 어떤 분이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교회 주일학교에 매주 데리고 왔었다. 아들을 주일학교에 데려다 놓고는 “횡”하니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어느 주일날 그 아이의 담당 선생님이 본당에 어른들 예배가 있다고 안내를 해주었다. 그분의 반응이 “저는 교회 안 다닙니다. 교회가면 나쁜 것 가르치지 않고 예수의 훌륭한 점들을 가르치니까 많이 보고 배우라고 제 아들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삶의 훌륭한 점을 배우는 취지라면 무신론자, 타종교인 가릴 것 없이 높은 관심과 좋은 호응을 보인다. 소위 예수님을 삶의 모범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기독교내 자유주의적 사고를 하는 분들 가운데서도 농도 짙게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사고가 가지는 위험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삶의 모범의 대상으로는 여기면서 신앙의 대상으로는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일반 위인들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예수님의 삶은 모든 인류들의 귀감이 될 만큼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들이 본받기에 합당하고 충분한 분이시다. 여기서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사람 사람간의 윤리와 도덕적 삶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현실은 예수님의 훌륭한 삶을 본받고자 하는 생각만큼 사람들의 윤리나 도덕적 삶의 수준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생각만큼 삶이 따라 갈수만 있었다면 보다 나은 세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이 부분의 난해함의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하게 포인트 한다. 사람 사람간의 윤리와 도덕적 삶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열정이 부족하거나 노력이 부족하거나 결심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죄” 문제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범적인 삶을 보여주신다는 차원 이전에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 그분이 곧 하나님이요 그분이 곧 구세주요 그분이 곧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신뢰를 두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제거해 주셨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주목하지 않고 단순히 그분의 모범적인 삶을 추구 하는 것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삶이 되어지지 않는 그저 생각에 그칠 뿐이다. 삶은 관념이나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다. 삶은 현실이다. 삶이 현실 속에서 현실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신앙의 모범을 뛰어 넘어서 신앙의 대상으로 믿고 받아 드리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