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MC 사무총장, Ph.D)
올해의 구정 명절 기간에 선교사들을 섬기기 위해 방문한 브라질의 상파울에서 보냈다. 구정 전날 저녁 한국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눈 여겨 보니 떡국이 메뉴에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대부분 한국사람들이지만 누구도 떡국을 시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도 떡국을 시키지 않고 다른 음식을 먹었다. 그 시간이 한국은 이미 구정이었다. 다음날은 주일이고, 한국의 구정이었다.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떡국 드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일상적인 인사도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아니 구정이라는 개념이 묻어나는 곳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2세들이 한국어를 아주 잘하여, 한국어 예배에 참석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교회였지만 고국의 정서를 잊고 살아가는 철저한 나그네의 삶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우리들은 나그네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 해석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헛된 꿈을 쫓아 신기루를 바라보며 살게 되고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나그네의 삶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핍박을 받던 어려운 시기에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지역에 흩어진 나그네인 디아스포라 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신 일들에 대하여 짧은 문장에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벧전 1:1-2). 흩어진 나그네를 먼저 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말해준다. 미리 안다는 것은 단순히 사실을 예견하고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미리 사랑하심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미리 사랑하실 만큼 흩어진 나그네가 된 사람을 아신다는 것이다. 나그네의 일거수일투족 삶의 여정을 아신다는 말이다. 우연히 흘러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가운데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핍박을 피하여 고향 이스라엘 땅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비자발적으로 어딘 가로 떠나야하는 난민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누구의 삶도 그냥 쓸모없이 버려두지 않으신 분이다. 그들이 나그네가 됨을 미리 아시고 사랑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성령님은 나그네의 삶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나그네의 노력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고 말한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누구도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전적인 은혜를 말하고 있다. 나그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십자가의 보혈때문에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택함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함받은 나그네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브라질의 한인 이민역사는 조금 특별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중남미 한인의 역사 편 에서는 브라질의 이민 역사를 5단계로 이루어졌다고 분석한다. 제1차는 1910년부터 1956년에 이르는 전이민단계로서 일본 국적으로 일본이민자들과 함께 들어간 숫자불명의 이민자들과 한국전쟁 이후 반공포로로서 제삼국인 브라질을 선택한 55인들이다. 제2차는 1961년부터 1962년의 준이민단계인데 이 때에 공식 이민의 문을 여는 시기이다. 브라질 한인 이민의 공식 역사를 시작하도록 도운 김수조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일본인으로 브라질에 이민을 가서 정착하였다. 그는 세계군인사격대회에 참가하였다가 사고를 당한 정인규 대령의 기사를 읽고 리우데자네이루로 그를 찾아가 브라질 이민의 문을 열게 된 인연을 만든 사람이다. 제3차는 1963년부터 1971년까지의 기간 동안 공식이민단계이다. 1962년 12월 18일 부산항을 떠나 1963년 2월 12일 브라질 산토스항에 도착한 103명의 한인들에 의해 공식적인 이민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1962년 해외이주법을 제정하고 최초의 공식 이민을 브라질로 허락한 것이다. 이 시기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지는데 1963년부터 1966년까지 5차례에 걸쳐 1천300여명의 농업 이민자가 브라질로 들어와 초기에 농민으로서 브라질 전 농촌 지역에 농장들을 세워 경영하였으나 실패하고 이들 중 90%가 농업 이민 계약 기간인 3년이 채 지나기 전인 1966년 상파울로 이주하였던 그룹이다. 이로 인하여 브라질 정부가 농업 이민을 금지하자 1971년에는 1천400여 명의 기술 이민자가 비행기로 한국해외개발공사를 통하여 이주 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대학 졸업장을 갖춘 고학력의 중산층들이거나 남대문이나 동대문에서 의류업에 종사한 경험이 있던 상인들이었다. 1980년도가 되면서 브라질의 의류산업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후에 미국으로 진출하여 미국의 의류업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2013년도 경에는 브라질 중상층 여성의류업계의 5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성장하기도 하였다. 제4단계는 1972년부터 80년에 이르는 불법 이민 단계이다. 브라질 정부의 이민 억제 정책이 있었지만 1960년대 말 서독에서 광부나 간호사로 일하였던 사람이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는데 일부가 브라질을 선택하여 들어왔고, 베트남에서 계약 노동자들도 계약이 끝나면서 미국이나 브라질로 들어갔다. 1970년대 초에는 태권도 사범들이 미국이나 브라질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미국을 최종 목적지로 삼은 많은 사람들이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를 경유지로 삼아 브라질을 찾았다. 제5단계는 1980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연쇄 이민 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가족이나 친지 초청으로 꾸준히 유입되어 상파울루의 이끌리마썽, 봉헤찌로와 브라스 구역에 집결하여 의류업 분야의 생산, 도매, 유통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안정과 번성을 누렸던 시기이다. 1990년대 이후는 브라질의 시장 개방과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인하여 한인사회 내에서 특히 남성들의 직업의 다양화와 경제적 차이로 인한 계층화를 가속화 시켰다고 한다. 한국의 기업들이 진출하고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길들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 1999년 1월 브라질의 재정 위기로 한인 사회 역시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많은 한인들이 미국행으로 이어졌다. 브라질에 사는 한인들은 특유의 근면함, 교육열 등으로 인하여 브라질 사회에서 경제적인 안정과 함께 이민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최근에는 팬데믹의 영향으로 5만여명의 브라질의 한인 이민 사회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모이지 못하던 교회들과 아예 브라질을 떠난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 2-3개가 합하기도 하고, 폐쇄하기도 하는 소식들에 만나는 한인들의 모습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한 모습과 활기를 잃은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단계를 거치면서 시작되고 유지된 한인들의 브라질 이민은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에 대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중남미한인의 역사편을 보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많은 한인 이민 사회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다. 브라질에서도 교회는 이민 사회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앞장 서 왔다. 이제 성도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브라질 사회에 동화할 뿐 아니라 주도적으로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교회 공동체로 세워 가야 할 것이다. 또한 한인 디아스포라의 네트웍 확장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섬겨가도록 우리들은 브라질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저자도 브라질에 대한 선입견이 실제 브라질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막연한 브라질에 대한 선교적 선입견은 아마존 정글을 누비는 선교사의 모습이다. 즉, 브라질이 선교지로서 우리들에게 보인 것은 원시문명 시대에 살고 있는 토착민정도로 우리가 가서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봐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브라질 사람들 가운데 76% 사람들이 세계에서 브라질이 현재보다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통계가 나왔다. 브라질을 조금만 더 잘 알아본다면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게 된다. 브라질은 남미의 절반에 달하는 국토와 인구를 가진 대국이다. 세계에서 7번째 큰 경제대국이다. 2억이 넘는 인구와 3,228 평방 마일에 이르는 면적은 전세계에서 5번째이다. 알라스카와 하와이를 제외한 미국의 본토보다 조금 더 큰 땅이 브라질이다. 현실에 비해 비교적 작게 생각되거나 적은 영향력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온 것은 일반인들이 무지하였기 때문이며, 한인 이민자들이 경제적 차이로 말미암아 북미주로 이주를 하는 정거장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브라질교회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세계선교를 위해서 귀한 파트너로 여기며 함께하는 자세를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브라질 교회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브라질은 단순한 선교지가 아니다. 브라질의 교회는 1960년도에만 해도 약 3%의 복음주의 성도들이 있었으나 2010년도에는 26%에 달하는 도약을 하였다. 인구의 약 5000만명이 복음주의 성도들 이라는 것이다. 브라질교회는 약 5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브라질 교회는 전 세계로 파송하는 글로벌선교와 국내로 유입된 디아스포라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와 국내에 남은 미전도종족 선교의 세가지 유형의 선교가 진행되고 있다. 브라질에는 2600만명에 달하는 이탈리아계 브라질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1200만여명의 독일계 브라질인, 200만명에 달하는 일본계 브라질인, 7백만여명의 요르단인을 중심으로 한 천만여명의 아랍계 브라질인들이 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열려 있는 기회이며 이들을 통하여 그들이 고국 친척들과 자민족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각 분야에서 한인선교사들과 한인교회들은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 것인지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브라질 교회와 선교운동을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한인 선교사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한다. 그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고 발전시켜 나가기도 하고, 빈곤층을 위한 교육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한인 선교사들 가운데는 브라질인들을 훈련시키는 신학교육에 중점을 둔 사역자들이 있고, 브라질인들을 훈련하여 선교사로 내보내는 사역에 중점을 둔 선교사들도 있다. 브라질교회의 선교운동에 함께 하는 지피선교회는 브라질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현지 이사회를 구성하고 파송선교회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먼저 택한 흩어진 나그네
나그네의 일거수일투족 삶의 여정을 먼저 아신다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같은 포르트칼어를 사용하는 모잠빅, 기니비사우 등 포어권의 국가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바울선교회는 훈련받은 브라질인들을 바울선교사로 파송 하고 있다. 아직은 한인선교사들과 함께 선교사 파송을 하는 숫자는 많지 않지만, 브라질 교회들이 앞장서서 선교사를 파송 할 수 있도록 꿈을 나누고 격려하여 브라질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브라질 교회의 가장 큰 세력으로 오순절 계열의 교회들이 활발하게 사역하며 증가하는 추세로 있다. 이들은 한국의 오순절교회에 대한 존경심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이런 영향으로 인하여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있다. 또한 브라질 장로교회도 한국 장로교의 제자훈련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좋은 부흥의 경험을 가지고 파송된 선교사들은 겸손하게 한국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경험들을 함께 나누고 선교사 훈련, 파송, 케어의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브라질의 이민 역사가 깊어 가는 만큼 브라질 출신의 한인 사역자들을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브라질에는 한인 선교사의 자녀들 (MK)이나 목회자 자녀들 (PK) 가운데 사역에 뛰어든 비교적 젊은 사역자들이 8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부모세대보다 훨씬 더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브라질 전문가들이 되어있거나 될 수 있는 세대들이다. 이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젊은 세대들 가운데 스스로 잘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들을 1세들과 함께 만날 수 있는 의도적 기회를 만들어 감으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리더십 계승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데 그 소망은 살아있는 소망이다. 현실 세계에서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너무 가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다 보면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보다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에 대한 갈망이 자꾸 떠오르게 된다. 그렇기에 창조자를 찾고, 세상을 주관하는 분을 찾게 되고, 나그네의 삶이 전부가 아닌 참다운 고향을 바라보게 된다. 그때에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과 죽음을 이기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먼 미래의 막연한 소망보다 더 크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죽음의 권세를 이긴 산소망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나그네는 복된 것이다. 나그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어떤 위협이나 죽음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는 소망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된 사람들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모두가 고향 땅에 살고 있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의 나그네들이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구정 떡국을 지나친 나그네로 살아가더라도 우리에게 산소망과 유업을 잇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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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