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이름은 한 개인에 대한 인격의 집합이요, 개인을 대신하는 명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특정인을 부르실 때, 그 세속적인 이름을 허물없이 사용하십니다. 즉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흠결 많은 인생 아브람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무려 11년이 지난 후에 창17장에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람이란 고귀한 아버지라는 의미인데, 그 것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그 자리에서 이제부터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고 해라, 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마도 그 새 이름을 받을 만한 신앙과 인격의 성숙을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야곱의 이름은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자(창25;26)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선지자인데도 그 이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오는 길목에서 형에서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야곱은 죽음을 무릅쓰고 기도했고, 그 기도 응답을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창32;28)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하사받았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이름을 그가 죽는 순간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즉 새 이름인 이스라엘은 창32;28절부터 50장까지 29번, 그리고 야곱의 이름이 43번이나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수많은 이름들을 기억합니다. 악한 황제인 네로나, 또는 독재자 히틀러나 스탈린 등등 말입니다. 그 이름들은 전 인류 역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악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님으로부터 이름을 받습니다. 그 받은 이름은 영원토록 자신을 대신하는 품격입니다. 그 이름이 어떤 의미로 주어졌던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사용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의 작은 간증입니다만, 저는 십대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누가 제 이름, 평우야! 하고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촌스런 이름, 누구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는 제 이름을 주님께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지금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그 때의 그 고요하지만 한없이 위엄 있으신 그 음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한없이 무력하고 소망이 없을 때 저를 불러주신 제 이름의 의미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추스릅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더더구나 그 이름을 불러주시는 분이 주님이실 때 그 감격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름을 불러주시는 장면이 수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신다는 것은 개인에게 찾아오심을 뜻합니다. 개인을 찾아오심은 개인을 오래전부터 주목하셨음을 의미하고 관찰하심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무에게나 이름을 불러주시지 않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는 분은 수첩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을 빼곡하게 기록하였다가 그 이름들을 부른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면 자신이 임명해야 할 대상들이 수천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자리를 작합한 사람을 찾아 맡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고로 평소 대통령의 야심을 가진 정치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신을 돕는 자로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우리 주님도 비슷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도 그 많은 자리를 채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면 전능하신 주님께서 채우셔야 할 자리는 상상할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어느 분은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름을 더럽힌 다는 것은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름은 한 개인의 전 인격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이름은 영원토록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로마의 남쪽에 위치한 오스티엔세(Ostiense)를 갔습니다. 거기는 기원전 로마의 어떤 부자가 이집트에서 거대한 피라밋을 보고 감동을 받아 자신의 무덤도 피라밋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규모는 한없이 작지만 말입니다. 돈이 있다고 자신의 무덤을 로마 한편에 거대하게 만들 수 있었던 로마는 역시 대단하다 싶습니다.
오스티인세 성벽 문 옆 담 벽에는 나치시대 저항했던 자들이 죽임을 당한 일을 기념하는 글을 새겨 벽에 붙여놓았고, 또 미국과 캐나다 연합군이 로마를 나치로부터 해방시킨 일과 그 부대의 최고 책임자인 장군의 이름이 기록된 돌 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슨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조금만 길을 따라 들어가면(Via Caio Cestio)외국인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그 묘지에는 로마에 살다 죽은 유명한 사람이 묻혀있습니다. 관리자에게 물어보니 대략 3천구 정도가 된다고 하네요. 그 중에 유명인들이 누구냐고 했더니 몇 사람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키이츠(Keat), 쉘리(Shelly), 그리고 독일의 시성 괴테의 아들입니다. 그 외는 설명하는데 저는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천구의 묘지들마다 이름들이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모르는 이름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여기에 묻히려면 엄격한 심사를 통해 묻혔을 것이고, 그렇다면 남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고 그 사실을 알아달라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월의 풍화작용은 이름의 의미까지 갉아먹게 했습니다. 묘지의 동쪽으로 나있는 통로를 따라 가면 좀 더 넓은 공간에 무덤들이 안온하게 있습니다. 통로 안에 있는 묘지들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조성되었는데 통로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여유 있게 조성된 묘지입니다. 카타콤 베의 지하 무덤에 들어가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의 구분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성된 무덤의 크기가 차이가 납니다.
역시 이곳도 비슷합니다. 아마도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매장지이겠으나 안타깝게도 묘지의 비석들도 마모가 되어 무슨 글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런던에 있는 웨슬리의 어머니 묘지에 갔더니 묘지석의 글이 마모가 되어 옆에 흰 페인트로 다시 써놓았더군요. 그러나 대부분의 묘지석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네 삶의 현 주소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묘지 동쪽 끝에 평토장에 묘비를 세운 묘지가 있습니다. 그 묘지가 바로 영국의 낭만주의를 이끌었던, 삼대 시인 중 한 사람, 키이츠(John keats 1795-1821))의 묘지입니다. 그는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따뜻한 이태리로 왔다가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Here lies one whose was write in water(이름을 물위에 쓴 사람이 여기에 누워있다). 이름을 물위에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의 하잘 것 없음을 치부하는 얘기이겠습니다만, 놀랍게도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이름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 철이 들었을까 싶은 스물여섯 살을 살았던 총각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름이라는 것, 그것은 생각할수록 신비하기만 합니다. 한 때 이름의 의미에 관심이 컷을 때 작명에 대한 관심이 굉장했습니다. 이름이 좋아야 출세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름만 바꾼다고 모든 일이 형통할 수 있을 까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작명해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소중하게 간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지양해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의 이름이 물위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사시나요? chiesadirom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