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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거꾸로 살아간 사람-성 프랜시스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부활주일이 지난 월요일은 가톨릭 국가에서는 큰 명절이다. 이날에 이태리 사람들은 고향의 가족을 찾기도 하고 또는 모두 야외로 나가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외국에 살다보면 이런 날이 제일 외롭게 느껴진다. 바(Bar)나 마켓에서는 선물용 초코렛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대목을 치르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우리네 같은 외국인들은 명절로 여기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생경하게 되고 이방인이 느끼는 외로움을 타게 된다. 변방인들이 느끼는 고독이 이런 게 아닐 까 싶다.

우리는 이날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도록 하기 위해 성 프랜시스가 죽기 전에 기도했던 곳을 탐방하기로 했다. 움브리아로 가는 길 국도 양쪽으로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그 흐드러진 꽃을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야, 아카시야꿀 많이 생산되겠구나’ 이었다. 그만큼 현대 물질주의가 목사의 마음을 지배하여 아름다운 아카시아의 꽃들을 자본주의 개념으로 따지게 되는 나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성 프랜시스가 기도한 베르나(S.Verna) 산은 로마에서는 약 270여Km 떨어진 곳이다. 이 산은 해발 1200여 미터의 높이인데 정상이 아름다운 바위 계곡으로 이루어져있어서 그런지 마음이 삽상해진다. 이런 곳을 어떻게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1222년 성 프랜시스가 죽기 2년 전에 제자 레오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하나님께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 죽기 전에....

이 시대 우리는 세상의 요구에 부응하여 어떻게 하면 힘 있는 자가 되고, 어떻게 하면 높아지게 될까에 목말라하고 전전긍긍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성 프랜시스는 세상을 반대로 살아간 사람일 수 있다. 세상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길을 말이다. 나는 목회를 하고 있기에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해서 많은 성도를 모이게 할까를 고민하는데 말이다.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주님의 고난을 느껴보기 원했고,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기를 소원했다.

그는 주님을 좇기로 작정한 후, 오직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두벌 옷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했고, 소유와는 담을 쌓는 청빈의 길을 고집했다. 고로 그는 자신이 소유한 작은 것일지라도 소유하지 못한 자를 만나게 될 때, 아낌없이 주는 삶을 추구했다. 현대적 무한 경쟁시대의 사고로 보면 정말 바보 같은 삶을 산 셈이다. 그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의 관심과는 동떨어진 사고로 오직 청빈의 삶을 밀고 나갔다. 매일의 양식을 위해 탁발을 하였고 얻지 못할 때는 기쁨으로 굶었다. 고로 그는 자주 금식함으로 육체는 점점 쇠약하여졌으나 영혼은 한 없이 맑았고 또 은혜로 충만할 수 있었다. 먹는 것과 은혜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아시시에서 이 곳까지 그 먼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왔다. 아마도 한 주간 가까이 걸렸을 것이다. 우리는 산 정상까지 꼬불꼬불한 길을 멀미를 하면서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그가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나귀를 빌려줄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말을 태워줄 사람도 있었기에 좀 더 편하고 쉽게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 정상에 올라 거대한 바위로 형성된 천연적인 동굴에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다. 제자에게는 내가 자네를 부르기 전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기도는 금식하는 기도였다. 그는 금식을 밥 먹듯 했다. 고로 그의 육체는 온갖 질병으로 충만했다고 한다. 담석, 통풍, 위장장해, 거기다가 시력까지 거의 잃어버릴 정황에 있었다고 한다. 그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 고난을 알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던 중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구약의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이 나타났고,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대로 프랜시스의 육체 다섯 곳에는 스티그마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오상이라고 칭함). 양손과 양발, 그리고 옆구리에 상처가 생겼고 그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고 한다.

상처로 인한 고통과 함께 말이다. 고로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항상 수건으로 상처부위를 감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 그 상처부위를 감추었기에 본 사람이 드물었는데(소문만 있었고-) 오상을 받았을 때, 곁에 있던 제자 레오와 그의 장례를 담당했던 제자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세세한 일에 대하여 우리는 주목할 필요는 없겠지 싶다. 다만 그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전력을 다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시대 우리는 진리에 대한 지식의 자부심을 가진다. 그러나 실천하는 데는 아주 빈약하다. 그래서 이 시대 목회자의 말은(나부터-)힘이 없다. 물론 영향력도 없고 말이다.

K목사님의 글을 보니 우리나라의 여러 목사님들이 성 프랜시스의 삶을 본 받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 중 한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한다.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목회적 삶에 있어서 거의 성자 같은 삶이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에 더욱 그리워지는 분이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에 미국 유학을 갔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입었을 것이다. 유학을 하는 분들은 너도나도 석사를 하고 박사를 얻는 것이 로망이다. 박사라는 칭호는 목회자들에게는 자랑스러운 훈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사님은 충분히 학위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3년만 공부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것은 성 프랜시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목회 하면서 받는 사례금을 어려운 성도들에게 봉투째 드림으로 당회에서 사모님께 따로 생활비를 지급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뿐인가? 자식이 목사인데도 교회를 물려주지 않았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한 가지 더 있다. 당시 많은 목회자들은 어릴 때 부모님이 점지해준 여자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깨었기에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보니 아내와는 지식적으로 너무 큰 갭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이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목사님은 배움이 없는 사모님과 평생을 해로하였고, 그것이 잘한 선택이었다고 어느 날 고백했다고 한다.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 까 싶다.

우리는 말로는 천국을 언급하지만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 프랜시스는 삶으로 천국이 있음을 친히 보여주었다. 그는 베르나 산에서 깊은 영적 체험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직 한참이나 젊은 나이인 44살에 말이다. 그는 죽을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옷을 벗겨달라고 했다. 세상에 올 때처럼 빨간 몸뚱이로 가기를 소원했다. 아니 주님께서 입혀주시는 영원한 옷, 세마포 옷을 입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입는 옷은 명품이라 해도 임시 가리개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벗어버려야 할 옷 말이다. 주님께서 입혀주시는 거룩한 세마포 옷, 그 옷만이 성도가 영원토록 입을 옷이요, 결코 벗지 않아도 되는 휘광이 찬란한 옷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거룩한 옷, 입기를 진정 소망하고 있는가?

이태리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도 단체로 와서 성 프랜시스의 편린들을 더듬고 있다. 이 많은 무리들이 한 사람, 성 프랜시스를 생각하며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그의 삶의 길을 따르려는 자는 누구일까? 놀라운 것을 그는 세상을 거꾸로 살아간 사람이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지식으로 무장하고 영민하게 사는 수많은 사람들로 만원인 데도 불구하고 본받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는 8백 년 전의 사람이지만 지금까지 참된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머릿속에 자꾸만 세상을 거꾸로 살았던 성 프랜시스가 명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chiesadirom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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